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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暗默知)와 기업의 조건 [thebell note]

조영갑 기자공개 2020-02-19 07:27:07

이 기사는 2020년 02월 18일 07:50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름난 맛집의 특징 중 하나는 메뉴가 단순하다는 점이다. 단일메뉴나 과하지 않은 몇가지로 오랜 세월을 돌파해 왔다. 점포확장이나 메뉴 다변화의 유혹에 빠질 법 하지만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키는 집도 많다. 단순함에 꾸준함의 미덕이 더해지면 곰삭은 업력은 대체하기 힘든 '상징'으로 승화한다.

이런 집(기업)의 비결을 정의할 때 호출되는 개념이 있다. '암묵지(暗默知)'다. 암묵지는 말 그대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다. 알고는 있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 몸에 익었지만 계량화하거나 수치화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한 우물만 파다보니 어느덧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암묵지를 체화했다는 말과 같다. 집중력과 꾸준함이 전제조건이다.

삼영순화는 일반인들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반도체 업계에서 대체불가한 상징이다. 이 맛집의 메뉴는 한 가지다. 과산화수소다. 1989년 설립한 이래 30년 넘게 반도체 식각 및 세척용 초고순도과산화수소만 만들었다. 물에 산소를 하나 더한(H2O2) 이 단순한 메뉴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정에 빠지면 안 되는 소재다. 최근에는 웨이퍼레벨(적층)이 고도화되면서 가치는 더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기획 부문 출신의 한 VC 심사역은 삼영순화를 두고 '미스터리한 기업'이라고 표현했다. 30년 이상 한 가지 물질만 생산, 납품하면서 부침없이 이익을 내는 기업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 단순한 메뉴가 글로벌 톱티어의 입맛을 장악한 이유 역시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초고순도 정제 기술의 레시피가 결정적이겠지만 삼영순화의 단순함과 꾸준함은 최근 소재 기업들이 본받아야 할 미덕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농익은 세월이 만든 암묵지가 작용했다는 말로 들렸다.

사실 삼영순화의 기술은 일본 미쓰비시가스화학에서 유래됐다. 장인정신(craftsmanship)을 유독 강조하는 일본은 '기업 암묵지'의 원산지다. 미쓰비시는 이미 1933년 과산화수소 농축기술을 개발했다. 50년 넘게 담금질한 기술은 1989년 반도체 태동기 한국으로 넘어와 삼영순화에 이식됐다. 영우화학에서 한솔화학(현 한솔케미칼)으로 한 차례 파트너가 바뀌었지만 51대 49의 합작구조는 32년 째 지속되고 있다. 메뉴 역시 마찬가지다.

최고 수준의 품질, 안정된 지배구조, 파트너 사들의 신뢰관계. 비상장사지만 매해 최대 매출액을 갱신하고 13%대의 영업이익(2018년 매출 1453억원, 영업익 200억원)을 올리는 삼영순화의 드러난 비결이다. 그 이면에 깊게 스며있는 암묵지는 무엇일까. 설명은 힘들어도 추측은 가능하다. 그것은 태도(attitude)다. 삼영순화와 합작파트너인 미쓰비시, 한솔케미칼의 일관된 태도에서 기업의 조건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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