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02월 25일 07:5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발전 공기업 채권 발행 과정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괄신고제도에 기댄 비정상적인 가격결정과 계열 간에 벌어지는 과도한 금리경쟁이 빈축을 사고 있다.국내 최대 이슈어 집단의 물량을 노린 국내 투자은행(IB)의 영업 관행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수료 녹이기가 성행하고 노마진을 넘어 역마진 영업에 나서는 증권사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괄신고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금융사의 채권 발행 과정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사례가 목격된다. 현행 일괄신고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일괄신고제도는 회사채 발행이 빈번한 기업의 조달 편의를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일반화한 제도로 '잘 알려진 기업(WKSI ; Well-known Seasoned Issuer)'을 대상으로 한다. 한마디로 증권신고서를 수시로 제출하지 않더라도 재무상황이나 투자위험을 비교적 상세히 인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기업에 주는 특권이다.
회사채 시장이 기업의 안정적 자금조달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일괄신고제도 자체의 효용성 역시 부정하기 어렵다. 쓰임에 따라 상당한 합리성을 갖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운용을 잘못하면 역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발행사가 제도를 활용하느냐 악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운용의 묘는 커녕 도입 때부터 공시 소홀의 빌미를 제공한 금융당국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금융당국은 지난 수년간 자신들이 도입한 일괄신고 활성화를 목표로 자격 요건을 낮추고 공시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바꿔왔다. 적어도 2012년 수요예측 도입 이후 일괄신고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투자설명서에 기술해야 할 내용을 생략하거나 주요사항을 누락해도 정정공시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상도 상장 기업 중 분기보고서를 제출한 기업이라면 별다른 제약 없이 허용했다.
우량 대기업 중 정보공개 수준이 뛰어난 발행사를 대상으로 하는 선진국과는 차이가 컸다. 고위험 업종으로 분류되는 캐피탈사 대부분이 일괄신고제도를 채택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금융당국이 잘 알려진 기업(WKSI)의 허용 범위와 공시 면제의 수준을 과하게 넓히자 발행사가 제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불순(?)해졌다. 일괄신고제도는 자본시장의 기본인 공시를 통한 간접 규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2012년 발행 시장 선진화 방안 도입 이후에는 수요예측를 피하고 기업실사를 형식적으로 받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게 됐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선진국 시장에서도 공시 부담 완화를 일괄신고제도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있기는 하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WKSI에게 주어진 특권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괄신고(Shelf registration)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FWP(Free Writing Prospectus)이다.
FWP는 말 그대로 투자설명서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성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하지만 FWP가 공시에 있어 무차별적인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보비대칭성 해소를 위해 갖춰야 할 내용은 투자설명서에 모두 들어가야 한다. 다만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했다. 잘 알려진 기업(WKSI)으로서 이 정도의 자질은 갖췄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WKSI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보다 깐깐한 당국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굴지의 우량 대기업 중에서도 선진적인 재무정책을 편 곳이 이에 해당한다. 자발적이고 투명한 정보공개는 필수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당장 투자자로부터 외면받는다. 국내 현실과 보여지는 양태는 비슷하지만 실질에서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최근 금융당국은 일괄신고제도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민간기업의 인가를 아예 허용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KT렌탈이나 우리F&I의 불가 방침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강압적으로 막고 보자는 식의 태도는 형평성 논란만 야기할 뿐 근본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일괄신고의 부작용은 '만들어 놓은 제도는 무조건 활성화해야 한다'는 관료주의의 강박에서 시작했다. 공시는 자본시장의 근간을 유지하는 힘이다. 기업의 조달 안정성을 돕는다는 회사채 시장의 존재 이유와 일괄신고제도의 취지도 공시를 통한 자율규제가 제대로 작동할 때만 유효하다. 현재 일괄신고 기업들이 WKSI로서의 자격을 갖췄는 지부터 다시 따져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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