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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0-02-13 04:00:00

이 기사는 2020년 02월 13일 04: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현대의 기아 인수전

현대차 본사가 있는 양재동에 보면 같은 모양 두 개의 빌딩이 나란히 서 있다. 각각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다. 멀리서는 두 개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쌍둥이 빌딩이 으레 그렇듯이 아래층에서는 넓은 홀로 연결되어 있다. 홀 분위기는 대학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자유로움이다. 현대차의 문화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장소다.

경영상황 악화를 장기간 분식회계로 숨겨오던 기아차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그해 10월 22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18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순위 8위의 거함이 침몰한 것이다. 무려 4조5천억 원의 누적적자기업이 정상기업으로 행세했다. 그해 4월부터 1995년에 자동차에 진출했던 삼성그룹 인수설이 벌써 나돌았다.

금융권에서 자금을 급히 회수하기 시작했고 주거래은행 제일은행이 부도유예협약 대상 기업으로 지정함으로써 기아는 좌초했다. 당진제철소를 무리하게 추진했던 14위 한보와 기아차의 몰락은 ‘국가부도’ IMF 체제를 부른 도화선이 되었다.

1998년 7월 기아차의 채권단은 국제입찰 방식으로 기아차 매각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현대차, 대우자동차, 삼성자동차, 포드가 입찰에 참여했다. 특히 삼성은 5% 내외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데 기아차 인수가 절실했기 때문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실제로 삼성은 기아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 부도유예협약 하에 있을 때 이미 기아차 인수를 추진했었다. 매물로 나오기도 전이었다.

기아차 입찰은 부채탕감 문제로 진통을 겪었고 3차까지 가는 곡절 끝에 결국 현대차로 낙점되었다. 가격은 1조2천억 원이었다. 현대차는 1998년 12월 1일 기아차를 인수했다.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는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큰 사건이었다. 자동차산업 글로벌 랭킹표를 보면 항상 현대-기아로 나온다.

기아차의 역사

현대차는 기아차의 34% 대주주다. 현대차에서는 구 기아차 시절의 기아차 역사는 별로 달갑지 않은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인수한 이상 현대차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기아차 홈페이지에는 회사의 사업과 제품 관련 연혁만 소개되어 있다.

기아차는 1944년 12월 고 김철호 회장의 경성정공으로 설립되었다. 그 유명한 삼천리자전거의 원조 ‘3000리호‘ 자전거를 생산했는데 기아라는 브랜드는 1952년에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바꾸면서 등장한 것이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에서 만섭(송강호 분)이 모는 브리사가 1974년에 출시되었다. 1976년에 현대 포니가 나오기 전까지 브리사는 국산 승용차 1위의 최강자였다. 기아차는 1976년에 아시아자동차도 인수했다.

1979년에 삼천리자전거가 분리독립되었는데 훗날의 기아차 지배구조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기아차는 5공화국 정부의 1981년 자동차공업통합조치(산업합리화)로 중소형 화물차와 버스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로 지정받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승용차 생산을 금지당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한국 최초의 실질적인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김석환 삼천리자전거 회장이 기아의 규모에 부담을 느껴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했다고 알려진다. 대주주 김상문 당시 회장은 민경중 아시아자동차 사장을 회장으로, 김선홍 기아기공 사장을 기아차 사장으로 보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난다.

김선홍 사장은 기아차에 사원으로 입사해 후일 회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봉고‘ 신화의 주인공이고 재벌 오너 체제 한국기업사에서 전문경영인의 원조로 여겨진다. 그러나 기아차의 몰락으로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김선홍 회장의 기아차는 1987년에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되면서 프라이드와 콩코드로 다시 살아났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침몰했다.

기아차의 부활

그런데 시민단체들이 기아를 살리겠다는 운동을 벌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기아차 팔아주기’ 운동도 있었다. 범국민 운동으로 확대할 참이었다. 기아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이른바 ‘국민기업’이라는 이유였다. 사실 그 때문에 기아의 기업 이미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 정치적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이한구, 한국재벌사, 503). 전문경영인 기업 기아에 호의적이었던 여론이 전문경영인이 오너 못지않은 황제경영을 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싸늘해졌다.

기아차에는 ‘노사유착’이라는 말도 있었다. 기아에서는 노조에 온정적인 김선홍 회장을 보호하기 위한 노조 파업도 있던 지경이었다. 경영진 내부의 알력도 심했고 민주노총의 핵심 강성노조의 파워가 지나치게 강했다. 우리사주조합 지분도 13.8%였다.

국내시장 점유율 50%와 25%였던 현대와 기아의 결합은 M&A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켰다. R&D 효율성이 높아졌고 기술융합의 시너지가 창출되었다. 중복투자가 없어져 기술투자에 비용이 절감되고 효율성은 높아졌다. 글로벌 생산과 판매 네트워크도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사실상 한 회사 같은 현대차와 기아차는 은근히 치열하게 경쟁한다. 한 회사에서 다른 부서들끼리 경쟁하는 것과 같다. 또 두 회사는 상장회사들이기 때문에 각각 다른 소수주주군이 있고 이사회와 경영진은 그 주주들의 이익도 배려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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