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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F '명판결'을 넘어서 [thebell note]

이장준 기자공개 2021-09-10 07:03:03

이 기사는 2021년 09월 09일 07:58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대금을 제때 갚지 못할 경우 살 1파운드를 베겠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준다. '연체 채무자'가 된 안토니오는 법정에 섰고 판사는 계약대로 샤일록에게 그의 살을 떼도록 허락한다.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된다는 엄포와 함께.

한 금융사 임원은 최근 해외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관련 1심 결과가 나온 뒤 '명판결'로 회자되는 고전(古典)을 들려줬다. 판결의 진가는 디테일에서 드러나니 단순한 승패를 넘어 판결문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귀띔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등이 금융감독원을 상대로 낸 문책경고 등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금감원이 잘못된 법리를 적용했다며 처분사유 가운데 80%를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는 동시에 판결문에는 은행 내부 부당행위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문제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냈다. 금감원에는 적법한 처분사유 한도에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제재 권한을 다시 행사하라고 주문했다. 단순히 한 쪽의 일방적 승리라고 해석할 순 없었다.

이번 판결은 명판결로 볼 수 있을까. 재판부는 금융사가 잘못은 저질렀지만 감독당국의 제재는 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안토니오가 채무를 불이행했지만 지나친 형벌을 주지 못하게 한 '베니스의 상인'의 결말과 닮은 구석이 있다. 물론 고전이 주는 인본주의적 감동에는 비할 바 없겠지만 충분히 좋은 판결로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가장 좋은 판결은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게 금감원도 살리고 금융사 CEO도 살리는 길이다. 당국 편만 들면 금융사 지배구조가 줄줄이 위태로워지고 금융사 편만 들면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없다." 이야기를 들려준 임원의 말에 공감하는 바다.

재판부는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무게 축이 쏠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썼다. 특히 당국과 금융사 모두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줬기에 의미가 깊다. 당국은 적절한 법리를 적용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점을 반성하고 다시 직무에 충실할 명분을 얻었다. 금융사도 완전무결하지 않은 만큼 소비자보호와 내부통제에 대한 경각심을 다졌다.

다만 '명판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서양에는 '어떤 명판결도 당사자 합의만 못 하다(A bad settlement is better than a good judgment)'는 격언도 있다. 애초에 양측이 첨예하게 각을 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재판부는 소임을 다했고 공은 다시 금융권으로 넘어왔다. 물론 금감원에는 항소라는 옵션도 남아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이번 판결의 교훈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승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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