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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권사의 한국물 '셈법' [thebell note]

김지원 기자공개 2022-09-01 13:36:36

이 기사는 2022년 08월 31일 07:5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어린 시절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기탄수학을 10장씩 푸는 것이었다. 기초탄탄을 줄여 만든 정직한 이름에 걸맞게 이 문제집은 지극히 기본에만 충실했다. 모든 문제가 사칙연산이었기에 문제를 푼다기보다는 기계적으로 해치웠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지루함을 못 견뎌 맨 뒷장에 딸린 답안지를 베낀 적도 여럿 있다.

한 권을 겨우 끝낼 때마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다음 단계의 문제집을 내 앞에 내려 놓으셨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기탄수학 여정은 한 자릿수 덧셈에서 시작해 네 자릿수 곱셈이 완벽해졌을 때쯤에서야 막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올해 네 번째 공모 외화채 발행을 앞두고 또 한 번 국내 증권사를 주관사단에 넣었다. 지난 3월 캥거루본드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국내사를 포함했다. KB증권이 상반기에만 두 번의 기회를 얻었고 이번엔 신한금융투자가 티켓을 받았다.

국내 발행사 가운데 토종 IB 육성에 가장 적극적인 수출입은행답게 이번에도 RFP를 돌리기 전부터 국내사 자리를 한 곳 떼어놨다. 한국물 시장에 국내사가 본격적으로 진입한 2~3년 전과 비교해 딜에 도전장을 내미는 국내사의 풀은 훨씬 다양해졌다. 요즘엔 중소형사도 심심찮게 이름을 올린다.

규모와 네트워크 측면에서 외사에 아직 한참 밀리는 국내사 안에서도 편차는 존재한다. 한국물 전담 조직을 꾸려 해외법인까지 총동원하는 곳에서부터 그때그때 DCM 인력 1~2명으로 팀을 꾸려 문을 두드리는 곳까지 다양하다. 발행사 입장에서 둘 중 누구를 택할지는 뻔하다. 딜에 조금이라도 더 기여할 가능성이 큰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수출입은행의 토종 IB 육성책은 아직 실험 단계에 가깝다. 이전에는 국내사에게 리서치나 서류 작업 정도를 담당케 했으나 최근엔 인베스터콜을 직접 리드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수출입은행이 매년 내주는 문제를 국내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풀고 있는지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글로벌 채권 시장으로 투자자 저변을 넓히겠다는 야심 찬 마음에서일 수도 있고 대외적으로 한국물 주관사라는 번듯한 간판 하나를 달고 싶은 욕심에서일 수도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딜이 쌓이면 저마다의 셈법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전 발행 과정을 지켜보는 수출입은행에게는 각 증권사가 얼마나 진심으로 이 시장에 뛰어드는지 보인다. 실제로 이번 글로벌본드 주관사단에 들지 못한 한 중소형 국내사는 수출입은행에 직접 전화해 세세한 피드백을 요청했다고 한다. 나름대로 일종의 오답 노트를 작성하고 있는 셈이다.

아직은 수출입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과 몇몇 공기업만이 국내사를 주관사로 기용하고 있기에 현실적으로 국내사가 경쟁력을 빠르게 키우기는 쉽지 않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진심 어린 마음으로 트랙 레코드를 하나씩 더해가며 역량을 스스로 곱할 수 있는 국내사가 등장하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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