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칼럼은 자본시장 전문 미디어 thebell이 만든 매거진 thebell insight : 2012 Korea Capital Market Outlook 에 게재됐습니다.
이 기사는 2011년 12월 29일 09:4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리테일 회사채 불완전 판매 관련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회사채시장을 함께 살아가는 입장에서 안타까움이 앞선다. 회사채시장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리 회사채시장이 진화하는 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회사채 리테일의 공로
회사채 리테일은 위기의 순간에 참으로 큰 일을 해냈다. 아슬아슬한 신용경색 상황에서 자금을 돌게 하는 것은 뛰어난 기획력과 구국의 일념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이익이 있는 곳이면 지옥의 끝까지라도 찾아가는 상인 정신으로 거뜬히 해낸 것이다.
은행은 관련 채권을 회수하고, 건설사는 상환 여력이 없고, 기관투자가는 등을 돌렸다. 이때 회사채 보부상들은 바리바리 등짐을 지고 전국 각지를 훑었다. 금번 경우처럼 난감한 사연들도 간혹 있겠지만, 덕분에 많은 기업들이 고비를 넘기고 활로를 찾았다. 은행은 무난히 디레버리징을 진행할 수 있었고 자본시장도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당시의 회사채 리테일은 전형적인 틈새시장이었다.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고금리 채권을 리스크 수용도가 보다 높은 고객을 찾아 팔았다. 워크아웃 제도의 틈새를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리스크를 제대로 분석하고 투자자와 공유하느냐가 관건이다. 단기적으로는 번거롭기만 한 이 프로세스가 장기적 성패를 좌우한다.
◇ 회사채시장이 위기에 강한 이유
회사채시장은 상대적으로 위기에 강하다. 개별 회사채 투자자는 금융위기가 두렵지만 회사채시장은 금융위기 때 도약한다. 회사채시장 특유의 세 가지 리스크 관리능력 때문이다.
그 하나가 리스크를 보상으로 치환하는 능력이다. 리스크가 커지면 은행은 곧장 거래를 중단하지만, 회사채시장에서는 금리를 높이면 거래가 계속된다. 마지막 대부자의 원래 개념, '높은 금리에 충분한 자금을 대여해준다(Lend freely at a high rate)'가 바로 이것이다.
또 하나가 리스크를 분산하는 능력이다. 투자자도, 만기도 분산된다. 리스크를 나누어도 리스크 자체는 작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연쇄폭발과 악순환만큼은 피할 수 있다. 그러면 어지간한 위기도 다룰 수 있다.
회사채시장이 강한 마지막 이유는 다양한 목소리와 눈높이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가 없고 쏠림도 작다. 집단사고(group-think)가 아니라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다.
◇ 우리 현실은 다르다
물론 우리 현실은 원론과 다르다. 우리 회사채시장의 리스크 치환능력은 대략 BBB+까지만 적용된다. 예전의 BBB-보다 더 좁아진 것이다. 이것을 하이일드 등급까지 확대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나름대로 온갖 방법을 찾아보지만 단기적으로는 어떤 성과가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리스크 분산도 충분하지 않다. 투자자의 범위는 회사채 리테일의 활약으로 확연히 넓어졌지만 만기의 분산, 다시 말해 장기화는 아직 요원하다. 선진 시장의 회사채 발행만기는 통상 10년이지만 우리 회사채 만기는 비교하기도 쑥스러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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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과제는 상당히 희망적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만기가 부쩍 길어지고 있다. 장기금리 하락에 따른 비용부담 축소도 한 원인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위기 이후의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인식 강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선진 시장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어쨌든 방향성만큼은 인상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정말 우리 회사채시장이 집단지성의 공간이냐는 것이다. 신용평가 등급만 바라보는 집단사고의 시장이라면 반드시 쏠림이 생기고 머지않아 벼랑 끝으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냥 신용평가의 품질을 탓하는 것도 우세스러운 일이다. 시장 스스로의 확신과 건강성, 그리고 투자자에 대한 예의가 우선이다. 우리 회사채시장의 현실은 이렇다. 결국 회사채시장의 세 가지 특성이 우리에게는 세 가지 과제인 셈이다.
◇ 지금 필요한 것
과연 이 세 가지 특성(=과제)들은 서로 별개의 이슈일까? 그렇지 않다. 서로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장점들도 빛을 잃는다. 결국 이 세 가지 과제는 한 묶음으로 해결해야 한다.
역사는 질서 있게 진행되지 않는다. 곧잘 우연이 필연을 이끌고, 변방에서 시작된 변화가 중심을 압도한다. 우리 회사채 리테일이 바로 그런 경우다. 금융위기의 와중에 우연히 변방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회사채시장 전반을 휩쓸었다. 잔뜩 움츠러드는 회사채 투자의 변경을 그나마 BBB+선에서 막아냈고 투자자 범위를 가계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리스크 분석과 공유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회사채 리테일에 뒤늦게 참여하여 마음 바쁜 증권사일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달라진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나에게 맞춘다. 결국 비합리적인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Bernard Shaw)." 합리성만 따지다가는 세상이 바뀌는 것을 놓친다. 그 발전을 안착시키고 더욱 고양시키는데 집중해야 한다. 걸어온 길보다는 가야 할 길이 더 길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리스크 분석과 공유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이 과제의 성공여부에 우리 회사채시장의 미래가 달려있다.
◇ '닥치고 발행'은 이제 그만
일단은 조짐이 좋다. 안팎과 손발이 척척 맞는다. 시장 내부적으로 신용분석 수요가 빠르게 커지고 있는데, 당국도 마침 기업실사 의무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주관사와 평가사의 기업실사는 자산실사가 아니라 질의응답을 통해 의문점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기업실사 의무화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 하나가 잘 아는 기업까지 실사를 할 이유는 없다는 주장이다. 글쎄다. 얼마나 잘 아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발등은 믿는 도끼에 찍히는 법이다. 금융위기의 역사가 생생하게 증명하는 단순한 진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자자에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시장의 돈을 쓰는 이의 기본적 의무이자 예의다.
번거롭고 비용이 증가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시장의 안정화와 자금조달의 장기화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신뢰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하나씩 거둬가면서 형성된다. 기존의 초간편 발행절차로는 의심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불가능하고, 이래서는 10년 만기 회사채를 소화할 수 없다. 달걀을 얻으려면 암탉의 시끄러운 소리를 참아야 한다.
보다 현실적인 반론은 그만한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 증권사를 차별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회사채 비즈니스를 제대로 하려면 다른 자본시장 상품보다 더 많은 시스템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중소 증권사가 감당 못할 정도로 부담이 크지는 않다.
회사채 비즈니스에는 자기자본보다 전문성이 더 핵심 변수이고,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증권사도 아직 없다. 아직 누구의 독무대도 아니라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 더욱이 회사채 비즈니스는 확장성이 커서 다양한 상품과 고객에 대한 접근성을 크게 높일 수 있는 기회의 창이다.
◇ 일파만파: 회사채시장
회사채 발행주관사의 기업실사 의무화는 회사채시장에 큰 변화를 야기한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달라진다. 하나는 발행기간의 장기화다. 형식상 3주일, 실질적으로는 1주일 남짓에 불과한 발행기간이 최소 1개월 이상 더 길어진다(선진 시장은 총 3~6개월). 또 하나는 투자정보의 제공 확대다. 정보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고 기업실사 자체도 정형화되기 마련이지만 물꼬를 트는 것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
관건은 그 다음이다. 파급효과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신용분석이 강화되는 것은 기본이다. 실사를 담당하는 주관사에게 상당한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평가사 등급에만 의존한 회사채 발행 프로세스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회사채시장의 정보흐름은 집단사고에서 집단지성으로 진화한다.
발행절차의 강화는 자연스럽게 발행빈도의 축소와 발행단위의 확대로 이어진다. 회사채를 1년에 서너 번 발행하는 것은 초간편 발행절차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선진시장의 회사채 발행은 통상 1~2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래야 회사채의 유동성이 확보된다. 국고채 통합발행(Fungible issue)의 논리는 회사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아가 발행사와 증권사 간의 관계도 일회적 만남에서 전략적 관계로 거양된다. 행정서사나 서무대리에서 파트너로 격상되는 것이다. 나아가 매수-매도(bid-offer)를 꾸준히 유지하는 유동성공급자의 역할까지 하게 된다. 당연히 IB수수료도 상당히 커진다.
◇ 일파만파: 신용평가
회사채시장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신용평가도 변한다.
글로벌 평가사의 기업실사는 몇 달에 걸쳐 진행된다. 공간적 제약보다는 질문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평가사의 기업실사는 유명무실하다. 기본적으로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회사채 발행절차 자체가 '퀵서비스'인데 평가사인들 무슨 여유가 있겠는가?
우리 평가사의 기업실사가 대대적으로 강화된다. 마침 당국이 모색하고 있는 신용평가 서비스 개선방안에 평가사의 기업실사 강화가 포함될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회사채 발행기간이 길어지면 신용평가 기간도 자연스럽게 길어지고 기업실사도 강화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신용평가는 회사채시장의 거울이다. 회사채시장이 변하면 평가사도 변한다. 회사채시장의 신용분석이 강화되면 평가사의 분석과정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평가사의 신용등급에 마냥 의존할 때보다 의존도를 낮출 때 평가사의 서비스가 더 좋아지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 벌이 쏘지 않아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좋은 것을 왜 이제야 하느냐고, 소망이 간절하여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고. 밤송이는 때가 되면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진다고 했다. 회사채 발행절차의 개선은 우리 회사채시장의 성장과 국민경제적 중요성 부각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다. 회사채 발행절차에 대한 문제 제기는 10년 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아직 우리 회사채시장이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그 때가 무르익었다.
제도개선을 위한 그간의 노력에도 경의를 보내지만, 그보다 더욱 큰 경의를 우리 회사채시장 구석구석에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의심을 업으로 삼은 크레딧 애널리스트가 좌표로 삼은 시가 하나 있다. Bertolt Brecht의 '의심을 찬양함'이다. 그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며 어지러운 글을 닫는다.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충고하노니 그대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여라! 그대들이 현명하게도 너무 그럴듯한 약속은 하지 않기를 나는 바랐다."
"이제 지도자가 된 그대여 기억하라. 그대가 지난날의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에,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대를 따르는 이들이 그대를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윤영환/신한금융투자/Credit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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