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2년 09월 21일 11:4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서울을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견줄만한 금융허브로 육성한다는 계획이 수립된 것은 노무현 정부가 막 들어섰던 10여 년 전이다. 처음 구상은 IMF 구제금융 체제 하에서 일련의 금융시장 개방 조치를 내렸던 김대중 정부 때였다고 하는데, 어쨌든 구체적인 조직을 만들어 움직인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첫 성과물은 2005년 7월 설립된 한국투자공사(KIC)다.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당시 유동성 위기에 몰린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투자했다 대규모 평가손실을 떠안으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주요한 국부펀드 중 하나로서 무시못할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이던 2006년 착공해 최근 정식 오픈한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1의 아시아 금융허브로 군림해온 홍콩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화려한 건물 외관도 그렇고, 명품 플래그숍과 자라(ZARA) 등 패스트 패션숍들이 즐비한 IFC몰은 마치 홍콩 센트럴 금융가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일라이트는 국민연금이다. 물론 국민연금이 금융허브 프로젝트의 성과물은 아니다. 다만 국민연금은 우리나라 금융허브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우리나라 국민연금기금은 최초 회계연도인 1988년 5279억원이던 적립액이 23년 6개월만인 2012년 6월말 현재 367조원으로 약 700배 늘었다. 뿐만 아니다. 10년후인 2022년에는 기금 적립액이 1000조로, 또 그후로부터 10년후인 2023년에는 2000조로 불어나 세계 최대 연기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10년사이 국민연금기금 운용 스타일은 느리긴 하지만 의미있게 변모해왔다. 장기 국채 위주로만 운용하던 국민연금은 불어나는 적립금과 한정된 투자자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체 투자 분야와 해외 자산으로 눈을 돌렸다.
국민연금기금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세계 자본시장을 쥐락펴락 주물러 온 기라성 같은 투자회사들이 국민연금 앞에 일제히 머리를 조아린다. 국민연금도 소중한 국민 노후 자금을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운용해줄 수 있는 실력있는 투자전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치가 문제다. '물질이 사상을 규정한다'는 '사적 유물론'은 적어도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맞지 않는다. 5년만에 다시 찾아온 정치의 계절은 서울을 아시아금융허브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인 국민연금을 다시금 뒤흔들고 있다.
국민연금, 행정공제, 군인공제 등 국내 연기금 3곳이 호주계 한 투자회사와 함께 2007년 거래한 국내 3위 멀티플렉스 M영화관 인수 딜이 한 초선 국회의원의 문제 제기로 시끄럽다. 문제의 요지는 "국민연금 등이 외국사와 결탁해 국민세금을 낭비했다"는 것이다. 낭비 금액도 적시했다. 자그마치 1000억원이란다.
의원 배지 달고 처음 맞이하는 국정감사다보니 튀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라 치자. 하지만 이후에 미칠 파장은 그리 간단치 않다. 문제 제기가 합당하다면 다시 따져볼만도 하다. 하지만 투자 분야 전문성이 결여된 자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흔드는 것이라면 국민의 노후 자금으로 도박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선 1000억원 손실의 근거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외부 자산평가기관이 평가한 국민연금의 M영화관 투자 지분의 공정가치는 220억원이다. 2007년 당시 M영화관을 지배하는 투자목적회사에 국민연금이 투자했던 원금 300억원에서 80억원의 평가손실이 나있는 셈이다.
행정공제, 군인공제 보유 지분의 평가손까지 합칠 경우 320억원 정도다. 한 정치 신인이 주장한 1000억원 손실과는 금액 차이가 일단 크다. 주주가치(EV; Equity Value)와 기업가치(EV; Enterprise Value)를 구별하지 못한 나머지 차입금 일부 상환에 따른 채권자 가치의 감소분을 주주가치의 평가손실에 반영하는 오류를 범했을 수 있다.
실은 외부 자산평가기관이 평가하는 주주가치의 공정가치도 정확하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M&A 기업가치는 대상 기업이 보유한 유형자산의 가치 뿐 아니라 사업의 향후 전략적 가치도 평가돼야 하는데, 이 부분은 다분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A가 100원이라고 평가하는 기업이나 자산도 B에게 팔면 200원이 될 수도 있다. B의 기존 사업과 결합하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고, B가 판단하는 사업기회가 A의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다. 따라서 투자의 진정한 가치는 실제로 투자 회수가 끝나기 전에는 이익이나 손실을 쉽사리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문제된 투자가 결과적으로 손실을 볼 수도 있다. 모든 투자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 1%의 위험도 용납하지 않겠다면 투자 수익도 기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운용 관리하는 자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기금 운용의 독립성이 정치권 외압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명확한 검증도 없이 연기금이 투자한 자산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만약 이번 일로 M영화관을 찾는 관객 수가 줄어들어 기업가치가 감소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국민의 노후자금이 정치 놀음에 희생되는 일이다.
M영화관 투자의 주역인 외국 투자사가 국민연금 등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챙긴 듯 소문이 나고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일단 국민연금 등은 이 회사 펀드의 출자자(LP)가 아니라 M영화관 인수목적회사(SPC)의 공동출자자다. 따라서 외국사에 연단위 관리수수료(maintence fee)를 지불하지 않는다. 최초 실사 경비와 자문료 등 명목으로 140억원 가량 지불되긴 했지만, 이마저도 SPC 주주간 우선손실충당 약정 때문에 별로 득이 없다.
세간에는 이번 문제 제기에 정치적 노림수가 숨어있다는 소문도 있다. M영화관 인수 딜을 알선한 E란 인물이 당시 외국사 임원으로, 유력 대선주자인 안철수 원장과 함께 브이소사이어티를 창립한 멤버란 사실 때문이다. 물론 현재로선 그 사실이 국민연금의 M영화관 투자와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국민연금의 M영화관 투자건을 대형 스캔들로 키우면 키울수록 안철수 원장을 엮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게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서울을 홍콩을 능가하는 금융허브로 만들어 다시는 IMF와 같은 환란을 겪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은 그냥 우리의 소망일 뿐이다. 국민연금도, KIC도, 화려한 국제금융센터(IFC) 빌딩들도 아직은 우리에게 사치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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