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3년 02월 15일 09:1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나태주 -
최근 당국과 언론의 상층부에서 회사채시장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이어지고 있다. 관심은 고맙지만 진단과 처방에는 좀처럼 공감하기 어렵다. 회사채시장의 장점은 간과하고 은행대출과 다른 점만 유독 강조한다.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주면 좋겠다.
가장 비근한 비판을 하나 짚어보자. "3년 전 금리가 낮대서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막상 만기가 되니 시장이 좀 어려워졌다고 차환을 안 해줘서 힘들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금리가 낮아서 은행대출에서 회사채로 옮겨오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아주 일부의 초우량 대기업들이나 가능한 이야기다. 자금흐름을 이해할 때 금리요인에 집착하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기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금리야 손익에 다소 영향을 주는 정도지만, 자금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위기 때는 더욱 그렇다.
회사채시장은 대개 금융위기 직후에 크게 도약한다. 물론 회사채시장도 금융위기에 상당한 내상을 입지만, 그보다는 은행의 디레버리징에 따른 반사효과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회사채시장 내부를 들여다보면 또 재미있다. 회사채시장의 주력인 기관투자가들은 위기를 의식해서 단기 우량채권 투자에서 쉽게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즈음에 새로운 투자자들이 등장한다. 증권사 리테일 창구에서의 회사채 판매가 급증한다. 개인투자자들이 기관이 제공하는 간접투자상품의 낮은 수익률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탈해서 직접 High risk high return 회사채 투자에 나서는 것이다.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이 민간 유격대의 맹활약을 계기로 돌연 뜨거워지는 고전 전쟁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전개다. 이렇게 개인투자자가 고금리 회사채를 인수하면서 위기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도 FED의 자금순환표의 회사채 투자자 현황을 재구성해보면 비슷한 흐름이 읽혀진다.
이런 유격대의 존재가 회사채시장의 매력이다. 금융회사가 혹시 어려움에 빠져도 금융시장이 마비되지 않고, 금리만 높이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시장의 가격조절기능'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유격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다. 그러나 은행이 고개를 돌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회사채시장은 그래도 한번 더 기회를 준다. 그 한번의 기회가 많은 기업들의 생사를 가른다.
유격대의 폭발력은 위기의 순간에 발현되는 잠재능력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회사채시장의 일반적 모습은 은행대출보다도 훨씬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이다. 위기 때 유격대로 활약하던 리테일 투자자들도 위기가 누그러지고 고금리의 매력이 감소하면 서서히 기관의 간접투자상품 시장으로 다시 흡수된다. 다시금 회사채시장이 기관투자가의 시각으로 재편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회사채시장과 은행대출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은행은 기업과 당사자의 관점에서 이슈를 풀어갈 수 있다. 필요하면 추가지원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예금보호와 당국의 엄호를 받기 때문에 거래기업 하나 문제가 생겼다고 예금이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엄연히 예금자의 돈이지만 내 돈처럼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시장은 다르다. 명실공히 수익자의 돈이다. 자칫 이슈에 말려들어 수익자의 신뢰를 잃으면 걷잡을 수 없는 환매사태에 봉착하게 된다. 이슈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그래서 대규모의 자금을 싸고 안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자본시장의 논리를 지켜줘야 한다. 그 하나가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꾸준히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가 유동성리스크를 낮게 관리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한 가지 이슈로 귀결된다. 바로 회사채시장을 불안하지 않게,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3년 전 금리가 낮대서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막상 만기가 되니 시장이 좀 어려워졌다고 차환을 안 해줘서 힘들다"고 했던가? 소위 '라쇼몽 효과'라고도 하는 주관적 인식에 불과하다. '위기 때 은행대출이 막힌 상황에서 고금리 회사채로 한 고비를 넘었지만, 사업 상황도 시장과의 소통도 개선시키지 못해서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다가 어느덧 만기가 돌아왔다.' 이것이 보다 객관적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회사채시장의 가장 큰 존재이유는 장기자금의 안정적 조달이다. 우리 회사채시장의 평균 발행만기는 지난 2010년 이후 꾸준히 장기화되어 최근에는 5년에 이르고 있다. 10년 만기가 일반적인 선진국과는 여전히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장기화 추세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점은 희망적이다.
그런데 회사채 만기는 길어져도 기업의 전체 차입금 만기는 별로 장기화되지 않고 있다. 은행대출이 더 단기화된 결과다. 이래서는 회사채 만기 장기화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미국에서는 단기성차입금 비중이 10%를 넘는 큰 회사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단기성차입금 비중이 40%를 넘는 대표급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왜 그럴까? 무역금융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과도한 보호가 근본적인 이유이고, 그래서 기업의 과도한 유동성리스크를 우리 회사채시장과 신용평가사조차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다. 무역진흥과 경제개발을 위해 금융자원을 총동원하던 시절의 관성이다. 우리 경제가 선진화·개방화·민주화의 큰 변화를 겪었지만 금융을 대하는 태도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선진기업의 차입금 관리 관행을 짚어보자. 차입금의 80% 이상이 회사채이고, 회사채는 통상 10년 만기로 발행한다. 그리고 1년 남은 회사채는 대개 조기상환(buyback)해서 단기성차입금 비중을 10% 이내로 유지한다. 금융위기로 한 1년쯤 자금차입이 안돼도 차입금 만기에 연연하지 않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최소한의 영업현금흐름만으로도 충분히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선진기업들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누차의 큰 위기를 겪으면서 조금씩 진화해온 결과다. 갈수록 시장의 변동성과 위기의 충격이 커지면서 무엇보다도 자금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쯤 되면 비로소 회사채시장이 예뻐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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