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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위기를 미리 막는 법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공개 2013-04-03 16:12:59

[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3년 04월 03일 16:1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그대보다 형들의 의술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했는데, 어째서 과인은 지금껏 그들의 명성을 듣지 못한 것인가?"
 "소신의 형들은 병이 가벼울 때나 아예 오기 전에 다스리기 때문에 알아보는 이가 드뭅니다. 반면에 병이 깊어져서야 비로소 손을 쓰는 소신은 과분한 명성을 얻고 있사옵니다."

편작의 형님들에 대한 유명한 일화는 신용위기 관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후적 위기관리도 물론 어렵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신용위기를 선제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선제적 위기관리는 정말 어렵다. 빛도 안 나고 자칫 신용위기를 초래했다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기 일쑤다.

뉴턴의 사과, 사실은 뉴턴이 직장을 잃고 고향 과수원에 머물 때 만유인력을 구상한 것이 전설로 발전한 것이란다. 신용위기에도 종종 이런 전설이 따라 붙는다. 과거의 무엇(=정책) 때문에 위기가 왔고, 누가 어떻게 해결했다는 식이다.

전설은 초보적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깊은 공부를 위해서는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마녀사냥과 영웅놀이 대신 시간과 관계의 변화로 요동치는 시장의 역동성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배울 것이 많다. 원인과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해야 제대로 신용이슈의 흐름을 짚을 수 있다. 그래야 편작의 형님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간 위기의 고비들에서 그런 순간들을 찾아보자.

2007년 11월 28일 점심시간, 채권시장이 공포에 휩싸였다. 외은지점의 투매로 시장이 급락했다. 소위 도시락폭탄이 터진 것이다. 시장의 원망은 투매의 원인이 되었던 외은지점 단기외채 규제로 향했다. 2006년 말 절정을 구가하던 채권시장이 2007년 들어 당국의 강력한 단기외채 관리로 급격히 냉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을 망가뜨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이런 법은 없다." 시장은 절규했고 내상은 깊었다.

그리고 불과 1년도 지나기 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시장은 크게 요동쳤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타격은 피해갈 수 있었다.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의 펀더멘털이 강고했을 수도 있고, 위기의 진앙지가 아닌 주변부라서 충격이 작았거나 당국의 기민한 대응이 주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기외채의 범람을 방치한 상태로,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된 건설PF 대책이 없었던 상태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일 그랬다면 훨씬 더 고생했을 것만큼은 분명했다.

물론 좀 더 일찍 적절한 정책대응을 했거나, 아예 처음부터 무리한 규제완화나 규제실패가 없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선제적 위기관리의 성가를 깎아 내릴 수는 없다.

2003년 카드위기도 2001년 중반 이후 20개월 남짓 당국이 총력을 기울여 선제적 위기관리를 진행한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선제적 대응노력이 부분적으로는 위기를 촉발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위기의 충격 완화에 기여한 부분이 훨씬 컸다.

당시 카드사들의 차입경로를 살펴보면 2002년을 전후하여 은행과 자본시장의 비중이 대략 2:1에서 1:2로 바뀐다. 당국이 적극적으로 카드사의 부담이 은행으로 전이되는 것을 차단(동일인 여신한도 강화 등)한 결과다. 결과적으로는 MMF의 대량 환매사태가 카드위기로 이어졌지만, 이후 은행을 중심으로 신용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은행의 부담을 사전에 줄여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사후적 위기대응도 그렇지만 선제적 위기대응은 더욱더 시장현황에 대한 이해가 큰 영향을 미친다. 분석은 결국 정보의 해석이다. 정보가 나쁘면 절대로 좋은 분석과 정책이 나올 수 없다. 최근 자본시장이 신용위기 관리의 핵심으로 부각되는 것도 금융혁신에 따른 정보흐름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존의 정보수집 체계로는 정보흐름의 변화를 담아내기 어려워졌고, 그만큼 리스크 관리에 심각한 구멍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최근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ABCP와 ELS 관련 규제, 지난 연말 회사채시장을 긴장시켰던 미매각 회사채 이슈도 정보체계 측면에서 바라보면 쉽게 흐름이 이해된다. 당국은 우선 공시 확대와 보고체계 개선을 통해 정보흐름부터 잡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시장은 한 호흡을 고르고 표정이 달라진다.

11년 전 카드위기 전야에는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4년간, 매년 약 90%씩 규모(카드 취급액)가 커지던 상황이었다. 카드사의 수익구조, 자산구성, 자금조달 등 모든 체계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내외의 통제기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당연히 각종 자료의 신뢰도도 의심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당국은 눈 앞의 불을 끄기 위해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엘로카드(한도강화)와 레드카드(금지)를 번갈아 꺼내 들어야 했다.

반면 최근 우리 당국의 대응은 은근하지만 자신감이 엿보인다. 위기관리 역량은 시장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은행과는 다른 자본시장 고유의 위기 속성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진 것이다.

자본시장의 위기속성은 대략 '단기 고성장 추구와 과도한 단기자금 의존, 그리고 낮은 정보투명성 및 정보비대칭성'에 따른 '시장의 급격한 쏠림과 투자의사 결정의 왜곡 및 모니터링 실패'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 기업과 금융시장의 과도한 단기자금 의존 등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은 요소들에서 뚜렷한 개선이 관찰되는 것은 분명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위기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쩍 증진된 이유는 무엇일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자본시장 리스크에 대한 인식 확산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또한 정책흐름의 변화에는 인적 요소도 무시하기 어렵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시장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금융회사와 협회 및 금융관련 연구소, 그리고 전문매체들이 생산하는 각종 데이터와 분석들이 위기관리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선제적 위기관리는 상대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 기존 이해관계의 벽에 가로막히기 쉽다. 함께해야 힘이 생긴다.

물론 여전히 선진시장에 비하면 아쉬운 점이 많다. 여론에 편승하는 가벼운 자료는 넘쳐나지만 통찰력 있는 심층분석은 드물다. 특히 증권사 이외의 일반 금융회사들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우리의 관행은 자칫 여론의 편중을 초래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우리 시장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곳곳에서 더 많은 편작의 형들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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