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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는 평범이외다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공개 2013-05-20 14:05:09

이 기사는 2013년 05월 20일 14:0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태두인 비로봉에 올랐을 때의 감흥을 "위대는 평범이외다"라고 적었다. 동해를 오가는 배들이 좌표로 삼는다는 비로봉 정상의 평범한 큰 바위에 바치는 지극한 헌사다.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도 비슷한 개념이다. 중세 교회의 교리논쟁에서 비롯된 용어로 여러 가설들이 대립하고 있을 경우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진실한 것은 단순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보아도 한결 같다. 복잡한 것이 다 그릇된 것은 아닐 것이지만 그에 따라붙는 조건과 단서들이 문제다. 조금만 상황이 달라져도 전혀 엉뚱한 괴물이 될 수 있다.

기업의 회계와 자금조달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업일수록 단순하다. 신용사건으로 투자자를 곤혹스럽게 했던 기업들을 돌아보라. 그 다수가 얼마 전에 이런 저런 복잡한 회계처리와 신묘한 자금조달로 분석자의 눈을 어지럽힌 기억들이 있다.

신용위험 관리에는 피드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뭔가 좋지 않을 때 이를 바로 잡아주면 단기적으로는 번거로워도 길게 보면 더 강건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번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은 향후 몇 년간 영향을 줄 큰 사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경제적 부흥으로 이끌 작지만 긍정적인 신호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8월 S&P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AA+로 강등했을 당시 '채권왕' 빌 그로스의 코멘트다.

어쨌든 당장은 아프다. 그래서 좋지 않을 때도 기업은 신용등급 하락에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곧 개선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하고, 다음에는 '자본확충이나 자산매각 등의 보완책을 준비할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달라'한다. 다소라도 가능성이 보이면 평가사도 말미를 준다.

이때쯤 곧잘 묘수가 등장한다. 부채비율은 분명히 낮아지는데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다. 신규자금 유입이 없거나, 있어도 사실상의 차입금에 가까운 것들이다. 물적분할, 환매 및 임대조건부 자산매각, 우선주 발행 등이 대표적이다. 명목상으로는 후순위지만 자산담보나 모기업의 보증으로 실질적으로는 선순위에 고금리 부담까지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당대의 회계기준은 충족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치수 조정으로는 어찌해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평가사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재무구조개선이 미흡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경우 평가사의 판단은 회계기준과는 별개의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지표가 바뀌면 실질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가사가 재무구조 개선을 인정하면 자금이 융통되면서 상황이 좋아진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그렇다. 시간 벌기에 그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래도 이런 일시적 회복을 발판으로 위기를 탈출하는 기업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서 신용평가가 어렵고 또 재미있다.

회계는 아주 유용한 도구다. 수익과 비용, 자산과 부채의 몇 가지 범주로 복잡한 기업활동을 묘사하고 소통한다. 그래서 신용분석도 우선적으로 회계에 의존한다. 하지만 신용분석은 현재보다는 미래에 더 큰 무게를 두어야 한다. 신용등급 하락의 고통은 상승의 기쁨보다 훨씬 무겁다. 신용분석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본적으로 채권자 편향적이고 방어적이고 보수적이다.

신용분석에서 환경변화는 필수적 고려요소다.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바뀌거나 큰 바람에 눕는다면 먼 바다의 좌표가 될 수 없다. 신용분석 지표도 한결 같아야 환영 받는다.

재무구조는 현금흐름과 함께 신용분석의 가장 중요한 축이다. 바람을 많이 타는 현금흐름에 비해 재무구조의 가치는 듬직함에 있다. 비율의 높고 낮음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좋은 기업의 재무구조는 심심할 정도로 꾸준하다. 그런 재무구조는 투자자와 평가사에게 믿음을 준다.

신종자본증권이 도입되면서 자본인정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회계기준은 아마도 자본인정으로 기우는 모양이다. 금융위기 당시의 절박함이 이제는 많이 가신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위기 때 까다로워지고 그것이 지나면 관용적으로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용분석의 관점은 아직 그리 녹록하지 않다. 회계기준과는 무관하게 평가사는 제한적으로 자본성을 인정하겠다는 분위기다. 신용분석 특유의 보수적 관점에 더하여 지난 위기의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건설PF나 선수금이나 용대선 체인이나 모두 적법한 회계처리였다지만 그 때문에 거품이 초래되고 결국은 신용위험에 크게 노출되었던 역사적 경험이 너무나 선명하다.

글로벌 평가사들은 기업공시 재무제표를 그대로 쓰지 않는다. 여러 나라에 걸쳐 신용평가를 하기 때문에 일관성 유지를 위해 나름의 수정을 가한다(Apple to apple 원칙). 반면 우리 평가사들은 공시 재무제표의 권위를 최대한 존중(Word for word)하여 아주 제한적 범위에서만 조정해왔다.

2011년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할 때도 우리 평가사는 평가기준의 조정을 설명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지만, 글로벌 평가사는 우린 원래 그렇게 해왔다며 뒷짐을 지는 분위기였다. 그리 보면 이번 논란은 우리 평가사들의 재무자료 활용이 보다 유연해지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신종자본증권(또는 하이브리드)의 자본인정을 둘러싼 논란도 간명하게 정리된다. 회계기준과 신용평가가 각기 제 갈 길을 가면 된다. 회사채 Covenant도 언젠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이것 역시 자기만의 입장을 갖게 될 것이다. 회계기준도 세월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첨삭이 이뤄지는 것인데 굳이 다른 영역에까지 획일적 적용을 강요할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이처럼 입장에 따라 적절히 조정해서 활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안전한 선택이다.

물론 기업은 회계기준의 자본인정을 명분 삼아 평가사에게 어필할 수 있다. 하지만 어필은 짧아야 좋다. 장기적으로는 큰 바위와 같은 묵직함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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