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3년 07월 01일 15:4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연초에는 회사채 만기도래 규모가 40조 원이라고 40조 폭탄이라고 하더니, 이제 하반기 만기가 20조 원 규모라고 20조 폭탄이란다. 아마 10조 원이면 10조 폭탄이라고 했을 것이고 5조 원이면 5조 폭탄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 규모가 얼마인지 중요하지 않다.최우량 신용등급인 AAA등급의 KB금융지주가 회사채 발행을 철회한 것은 우리나라 기업 전체의 자금조달이 막혔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쓰인다. KB금융지주가 채권발행을 철회한 것인지, 철회를 당한 것인지 따지지 않는다.
회사채 시장 고사직전, 우량 기업도 수요예측 줄줄이 실패, 심지어 회사채 시장 '붕괴'라는 험악한 표현들이 각종 언론과 당국자들 입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아니나 다를까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부활한다는 둥 채권시장안정기금펀드(이하 채안펀드)를 재가동한다는 둥 특단의 대책들이 거론된다.
확실히 지난 6월은 회사채 시장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출구전략 시사 발언 이후 금리가 속등하는 바람에 거래 중단이 속출했고 수요예측은 줄줄이 실패했으며 여기저기서 손실을 입은 투자기관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시장 붕괴라니… 침소봉대도 정도가 있지. 시장 붕괴라는 말이 성립을 하려면 최소한 주가가 20~30% 순식간에 폭락하고, 이자를 아무리 높게 쳐준다고 해도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 다시 말해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결정 기능이 완전히 상실돼서 거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쯤은 돼야 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1년의 9.11 사태, 2003년 신용카드 위기, 그리고 지난 2008년의 서브프라임 위기 정도가 시장 붕괴에 해당될 것이다.
좀 따져보자. KB금융지주가 금리를 높여도 투자자를 구할 수가 없어서 회사채 발행을 철회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수요예측에서 투자자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KB금융지주는 원하는 금리에 발행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계약에 따라 총액인수를 할 대우증권이 손실을 입을 처지에 놓였을 뿐이다. KB금융지주는 스스로 회사채 발행을 철회했다. 설명하기로는 자신의 채권을 인수한 대우증권이 시장에 싸게 내놓았을 경우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KB금융지주 말고도 요즘 회사채 수요예측에 투자자가 모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연일 파리만 날리고 있다. 하지만 수요예측에 실패를 하더라도 회사채 발행에는 문제가 없다. 증권사가 총액을 인수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수요예측 실패는 기업이 원하는 낮은 금리와 투자자들이 원하는 높은 금리의 간극이 예전보다 더 벌어졌음을 의미할 뿐 시장 붕괴나 기업 자금조달 중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회사채 수요가 완전히 실종된 것도 아니다. 대한항공은 예정보다 100억 원을 증액해 2100억 원의 영구채를 발행했고 투기등급인 동양시멘트도 800억 원의 회사채 투자자를 거뜬히 모았다. 하나대투증권은 1000억 원의 후순위채를, 우리에프아이에스는 500억 원의 회사채를, KT는 4140억 원의 매출채권 유동화사채를 발행키로 했다. 대표적인 위험업종인 대림산업의 회사채는 산업은행이 순전히 상업적인(?) 판단으로 대부분을 사갔다. 회사채 시장의 분위기가 확실히 식기는 했지만 가격결정 기능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시장에는 1년에 약 100조 원의 회사채가 새로 발행된다. 아직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반기 20조 원의 만기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시장이 아니다. 폭탄이니 붕괴니 하는 건 우리 회사채 시장을 너무 얕잡아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기업들이 줄줄이 망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하거나 다른 노림수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은행 대출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주가는 떨어져도 주식시장도 멀쩡히 돌아가는데 회사채 시장만 고사위기라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대책을 세워야 할지, 세운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지 알려면 상황판단부터 정확히 해야 한다. '위기'니 '폭탄'이니 하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은 클릭 수 높이는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시장에는 불안심리만 조장할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국의 호들갑은 남이 볼까 두려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2001년 하이닉스를 살리는데 동원됐던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나 한국은행까지 나서야 하는 채권시장안정펀드(이하 채안펀드)처럼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나 써야 할 최후의 보루를 꺼내는 것은 OECD 가입국이고 G20 의장국인 나라의 금융당국치고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우리나라 회사채 시장이 아무리 높은 파도에도 끄떡없는 크고 튼튼한 배라고 강변하는 것은 아니다. 수요기반이 취약하다는 구조적이고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신용등급 A 이상에만 투자하는 대형 연기금, 보험사, 은행 등의 기관투자가 뿐이니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0.1%의 기업만이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고, 0.1%의 투자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이다. 마치 모든 식당이 한 가지 메뉴만 파는 시장과 같아서 식성이 다른 손님은 가 봐야 먹을 게 없거나 너무 비싸서 사먹을 수 없다.
시장이 사시사철 잘 돌아가려면 다양한 메뉴를 파는 다양한 식당들이 있고, 서로 다른 식성을 갖고 있는 손님들이 어울려 음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자본시장에서 그런 역할을 하라고 만들어 놓은 곳이 바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다. 증권사를 통해 발행된 회사채를 재료로 자산운용사가 다양한 위험-수익 구조의 펀드를 만들어 팔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100배는 많은 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100배는 많은 투자자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채 시장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샘이 깊은 물처럼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그 이후에는 금리가 조금 올랐다고 회사채 신속인수제니, 채안펀드니 하며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진정 회사채 시장에 사명감을 갖고 있다면 죽을 힘을 다해 공모 회사채 펀드를 활성화해야 할 일이다.
사족이 되겠지만 회사채 신속인수제가 정말로 회사채 시장을 살리는 대책인지 죽이는 정책인지 금융당국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신용도가 하락해 채권발행이 어려울 것 같으면 정부가 나서서 '신속하게' 인수해 주는데, 기업실사니 수요예측이니 하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모 시장이 무슨 필요일까. 기업마다 신용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사나 투자할 만한 곳인지 따져보는 크레딧 애널리스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안 팔리고 남은 음식을 전부 사주는 손님이 있는데, 맛이나 영양을 신경이나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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