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3년 08월 28일 18:5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돌이켜 보면 2009년 MB 정부의 산업은행 민영화 계획이 전혀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는 개발도상국을 지나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합류해 가는 상황이었고, 그런 실물경제의 흐름에 맞추어 금융시스템 역시 은행 중심에서 여타 선진국 수준의 금융시장 중심으로 전환이 필요했다. 개발 경제 시대의 개발금융을 제공하는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수명은 끝난 것으로 보였다.기업금융 부문에서 압도적인 노하우와 탁월한 역량을 갖춘 산업은행을 여차저차해서 인수하게 된 대우증권과 묶어 CIB(Corporat & Investment Bank) 모델로 민영화한다는 게 그럴싸해 보였다. 기업금융 중심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겸비하겠다는 이 모델은 한편으로는 양다리 걸치기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였을 것이다. 산업은행을 민영화해 한국판 골드만삭스로 만들지 않으면 한국 자본시장은 외국 투자은행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라는 당시의 여론몰이에는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말이다.
민영화 논의는 끝났다. 이제 산업은행은 제 몸의 일부였던 정책금융공사를 다시 흡수하고, 정책금융기능과는 관련이 없는 산은캐피탈 산은자산운용 대우증권 등 계열 자회사들을 매각한 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4년 전 민영화 계획이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처럼, 다시 정책금융기관으로 남기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와 저항이 상당한 모양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한국 기업이나 금융의 역사에서 산업은행의 공로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개발금융 시대를 지나 외환위기 이후만 하더라도 금융시장이 붕괴될 때마다 구세주로 등장한 것은 산업은행이었다. 지금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과거에는 산업은행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지 않었던가. 망해가던 현대건설을 살릴 때도, 어쩌면 외국에 헐값으로 넘겨졌을 지 모를 하이닉스를 구할 때도 산업은행은 주역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대주단협약을 주도해 건설사 등의 집단 부도사태를 막아냈고, 발행시장 CBO(Primary CBO)를 활용해 중견·중소기업에 자금의 물꼬를 터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돌아온 산업은행이 한편으로는 반갑다. 민간 은행과 자본시장에서 돈이 흘러들어가지 않는 창업기업, 중소·중견기업, 신성장산업기업 그리고 부실이 쌓여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인 대기업에게 비빌 언덕이 생겼다는 면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이런 기업들이 여전히 산업은행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지금의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이 말이다.
특히 회사채 시장의 불완전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금융위기 이후 'Last Resort'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며 연간 발행액 100조 원이 넘는 큰 시장으로 성장했지만, 덩치만 큰 요즘의 청소년을 보는 듯 하다.
지금의 회사채 시장은 대한민국 전체에서 0.1% 안에 드는 우량 대기업들만의 리그다. 극소수의 AA급 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를 소화하기 위해 수십개 증권사가 박 터지게 싸우고, 연기금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기관투자가들이 목을 맨다. 신용등급 BBB급이면 그래도 표준 이상은 되는 기업들인데, 웬만해서는 이 시장에 접근하기 조차 어렵다.
현실적으로, 회사채 시장에서 산업은행의 필요성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있다. 정책금융기관으로 복귀하는 산업은행에 여전히 회사채 인수·주선 기능을 부여하더라도, 시장을 보완하고 지원하고 육성하기 위해 그 쓰임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을 중심으로 한 시장의 논리와, 정책금융의 논리가 같을 수 없다. 국책은행의 지위로 AAA등급을 받는 산업은행의 자금동원능력과 거기에서 나오는 회사채 인수능력을 넘어설 민간 증권사는 아직 없다. 이런 산업은행이 자본시장의 '선수'로서 민간 증권사들과 같은 링에서 경쟁한다면 구축효과( crowding-out effect , 驅逐效果)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원론적으로는 민영화를 하지 않기로 한 이상 산업은행의 회사채 인수 기능을 박탈하는 것이 맞겠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면 이 기능을 산업은행 '자신'이 아닌 '시장'의 발전을 위해 써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약속을 해 주면 더욱 좋다. 지난 4년간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켜켜이 쌓인 민간의 때를 벗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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