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3년 11월 04일 16:4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분석보고서(2013.10.31)의 신용평가에 대한 언급("거시건전성 기반 강화를 위한 신용평가시장 재정립 필요성")을 접하는 순간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한국은행 특유의 매력적이고 심도 있는 분석 대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애매한 논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회사채시장 불안의 근저에는 신용평가의 신뢰성 부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복수신용평가제도의 존재가 신용평가회사 상호 간 경쟁을 오히려 제약하는 요인으로 자리잡게 된 측면도 있다."
"국내 신용평가등급이 글로벌 신용평가등급에 비해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이 건설업, 해운업 관련 피평가기업의 부실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지 못하고 등급조정에 실패한 사례가 수차례 나타난 점도 국내 신용평가등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량 회사채 유통수익률과 은행 대출금리 간의 격차는 금융시장 참가자들이 가능한 한 우량 신용평가등급의 채권을 매입하여 신용평가등급의 취약한 신뢰성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비우량 회사채의 유통수익률과 은행 대출금리 간의 격차는 금융시장 참가자들이 중소기업의 재무건전성에 대해 신용평가등급 이상으로 비관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만큼 신용평가등급의 신뢰성이 취약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 신용평가회사의 관대한 신용평가등급 부여 관행으로 인해 차주 기업의 신용도가 과대평가되는 경우, 자기자본비율 산출을 위한 위험가중치가 과소 적용되면서 표준등급법 적용 은행 등 일부 국내은행의 BIS자기자본비율이 과대 계상될 가능성이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회사가 주주 자격으로 국내 신용평가회사를 지배할 경우, 스스로의 평판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 배당수익 극대화를 위해 단기실적을 중시하도록 요구할 개연성이 높다. 이는 결국 느슨한 신용평가로 이어져 신용평가의 신뢰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중앙은행의 관심이 반갑다
위기 이후 마녀사냥이 벌어질 때마다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신용평가회사의 숙명이다. 그 비판들 가운데는 깊은 성찰을 거쳐 신용평가 논리와 제도의 진화로 이어가야 할 것들도 다수 있지만, 그저 지나가는 화풀이로 치부할 수 밖에 없는 논리의 비약이나 대안 없는 투덜거림 또한 넘쳐난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잘 가려서 듣고 챙겨야 한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안 고치는 것도 문제지만, 외양간을 '미노스의 미궁'으로 바꿔서 제대로 소를 기를 수 없게 되면 더 큰 문제다.
물론 신용평가에 대한 비판이 모두 정교할 수는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느낌만으로 견해를 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외양간의 재설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모순의 근본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합리적인 대안 모색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것이 평소 한국은행의 자세다. 그런데 왜 금번 신용평가에 대한 분석은 전혀 다른 모습일까?
신용평가에 대한 논의를 금융안정보고서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보면 힌트가 보인다. 한국은행 보고서 특유의 풍부한 데이터와 연구성과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각종 이슈에 대한 언급도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그런 견해가 있다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충분한 데이터 축적과 연구성과가 뒷받침된 정책방향 제시가 아니라 이제 막 문제인식과 학습을 시작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공은 이제 회사채시장과 신용평가회사에게 넘어 온 것이다. 중앙은행의 편견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중앙은행의 관심에 대한 반가움이 훨씬 크다. 그런 반가움을 담아 앞서 소개한 금융안정보고서의 언급에 대한 몇 가지 반론을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반론1] 회사채시장 불안과 신용평가의 신뢰성 부족
신용평가의 신뢰성 부족 때문에 회사채시장 불안이 심화되었다는 주장은 전형적인 인과관계의 오류다. 회사채시장의 크기에 비해 우리 신용평가회사는 정말 한줌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용평가 이슈가 단순히 평가사의 태도나 능력의 문제라면 당국이 벌써 오래 전에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은 문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회사채시장의 온갖 모순이 집약되어 반영된 것이다. 모순의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작은 표출이라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었던 사라예보의 총성과 마찬가지다.
회사채시장의 성장은 전형적인 네트워크 이슈다. 개선노력이 좀처럼 잘 먹혀 들지 않는다. 과제 하나를 해결해도 다른 문제가 있으면 효과가 뚝 떨어진다. 그렇다고 좀처럼 꽉 막히지도 않는다. 한 쪽이 막히면 다른 쪽이 열린다. 뚜렷한 중심이 없어 무질서해 보여도 집단적 의지로 방향을 만들어간다. 네트워크의 초기 성장은 더디지만, 일단 프로토콜이 갖춰지면 급속도로 확장된다.
은행의 중앙집중적 시스템에 익숙한 이에게는 자본시장의 네트워크적 성격이 못내 생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유념하자. 회사채시장의 신용평가는 평가사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사가 내려주는 신용등급에 시장이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것은 재앙이 된다. 오죽하면 위기 이후의 국제적 컨센서스가 바로 '신용평가사에 대한 의존도 축소'이었겠는가?
회사채시장은 신용평가사와 다른 목소리가 많을수록 더 건강해진다. 그런 잡음과 다양성이 신용평가 논리의 발전을 이끈다. 건설/해운/조선에서의 신용평가 실패는 물론 아프다. 하지만 회사채시장의 피해가 은행 여신보다 훨씬 작았다는 점 또한 상기해야 한다. 시장과 평가사가 밀고 당기며 새로운 문제 인식을 제기하고 공유하면서 시장의 리스크 대응능력이 한 단계 올라간 결과다.
최근에는 회사채발행절차의 정상화라는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기업실사와 수요예측이 도입되면서 발행절차개시에서 투자자결정까지의 기간이 1주일 미만에서 최소 3주일로 크게 길어졌다. 그만큼 공론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아직은 도입 초기로 가능성을 말하는 수준이지만 미래는 충분히 희망적이다.
[반론2] 기본 개념의 오해: 복수신용평가와 독자신용등급
독자신용등급은 "대기업계열 기업이라 하더라도 모기업 등 외부로부터의 자금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해당 기업의 펀더멘털만을 반영하여 신용평가등급을 산정토록 하는 신용평가제도"가 아니다.
본래 독자신용등급은 계열의 지원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일상적 수준의 업무협력과 재무적 지원을 포함한 등급이다. 그저 유사시 지원가능성이라는 기대심리를 분리해서 설명하자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열분리(또는 재벌해체)를 전제로 한 신용등급이라는 시각을 좀처럼 정리하지 못했다. 결국 저항과 불안이 야기되고 도입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복수평가 또한 국제적 관행이다. 그럼에도 심심하면 복수평가제도 폐지가 거론된다. 복수평가제 폐지 논의에는 세 갈래의 접근이 있다.
하나는 발행자 단체가 규제완화 차원에서 주장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채권시가평가의 도입으로 회사채시장이 자리잡기 전의 주장이다. 당시에는 신용등급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았다. 회사채 발행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신용평가를 둘씩이나 받아야 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또 하나의 접근은 입법기술적인 이슈다. 국제적으로는 관행에 해당하는 것을 우리는 다수 제도로 운용하고 있다. 시장의 빠른 정착을 위해 입법기술상의 어색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당연히 시장이 성숙되어 관행이 자리잡으면 제도로서의 복수평가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은 일종의 타성이다. 제도에 대한 논의는 한번 제기되면 그 연원과 무관하게 비슷한 상황만 되면 대응방안 리스트에 다시 올라오곤 한다. 복수평가제도 폐지는 신용평가 이슈가 나올 때마다 상습적으로 올라왔다가 아주 조용히 사라지는 단골이슈다.
이렇게 복수평가제 폐지는 '평가사 간 경쟁을 통한 품질개선'과는 전혀 무관한 이슈다. 물론 복수평가제도를 폐지하고 단수평가로 바꾸면 평가사간 경쟁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용평가 품질개선이 아니라 발행자 우위의 강화를 의미한다. 이를 기대하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반론3] 회사채시장 양극화와 신용평가
회사채시장의 양극화에 대한 문제인식에는 절대 공감한다. 과연 변경을 버리고 가운데로만 모여들어 성공한 역사가 있었나 싶다. 계속 이렇게 나가면 회사채시장은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신용평가등급의 취약한 신뢰성에서 찾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혹자는 글로벌 신용등급과의 등급격차를 들어 우리의 A등급이 글로벌에서는 투기등급(하이일드)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는 점은 설명하지 못한다.
회사채시장 양극화를 신용평가의 이슈로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부당결부에 해당한다. 선진시장의 사례를 보면 금융위기로 하이일드 등급의 부도율이 솟구칠 때 하이일드 채권의 수익률도 함께 솟구치지만 하이일드 시장의 위축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면 선진시장에서 하이일드 시장 활성화를 견인하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펀드의 활성화다. 펀드의 포트폴리오 분산효과를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기 때문에 하이일드 시장의 매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 회사채시장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애먼 신용평가의 신뢰도 이슈가 아니라 회사채펀드 활성화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반론4] 신용평가와 BIS비율 과대 계상
관대한 신용평가등급 부여로 은행의 위험가중치가 과소 적용되면서 은행의 건전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논리 전개는 처음 보는 것이다. 흐름도를 보면서 이렇게 논리가 확장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은행 건전성에 대한 중앙은행의 높은 관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주요 은행이 위험가중치 산정에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시 부당결부에 해당한다.
[반론5] 글로벌 평가사의 시장진입
우리나라 회사채시장에 대한 국제적 외면을 우려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한다. 투자자 기반의 다양화는 회사채시장의 안정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글로벌 및 국내신용평가회사 간 신용등급의 상이함으로 연결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당결부일 뿐이다.
금융안정보고서에 인용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들 다수가 글로벌 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평가사의 등급과는 상당한 간격이 있으며, 그 간격도 업체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
글로벌 신용등급과 우리나라(로컬) 평가사의 신용등급은 기준점에서 차이가 있다. 글로벌 평가사가 우리 정부의 신용등급을 BBB-로 평가하든 AA-로 평가하든 우리 평가사의 우리 정부 신용등급은 AAA다. 언젠가 우리 정부의 글로벌 신용등급이 AAA에 접근할 때 즈음이면 우리 평가사의 기준점도 글로벌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이라도 과감히 우리 평가사의 기준점을 글로벌 평가사에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훨씬 많다. 등급체계의 일관성도 문제가 되지만 낮은 등급에서의 변별력이 약화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우리가 글로벌 평가사의 시장장악을 위해 스스로 멍석을 깔아야 하는가? 신용평가에도 국가적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등급 차이가 일관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쉽게 단정할 부분은 아니다. 우리의 신용평가는 국가기간산업에 대해서는 정책적 지원가능성을 감안하여 재무적 기준을 다소 관대하게 적용한다. 반면 글로벌 평가사는 규제 의존적 산업은 변동성이 크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리 회사채 시장에 소원한 것은 신용등급 때문이 아니다. 투자할만한 기업들은 대부분 이미 글로벌 신용등급을 가지고 있다. 그 보다는 우리 회사채시장의 거래 투명성과 안정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우리는 회사채 발행절차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이제야 겨우 도입한 상황이다.
자료 확충과 심층 연구를 기대하며
중앙은행의 힘은 구체적인 정책집행 못지않게, 그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서도 발휘된다. 측정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는 법이다(No measurement, no management). 종종 금융시장에 심각한 변화가 있었지만 데이터가 집계되지 않아 엉뚱한 해석이 난무하고 정책대응이 지연되기도 한다.
회사채시장 주변의 사안으로 보자면 2005년 4분기의 은행사모사채, 2006년과 2007년의 건설PF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ABCP와 신탁 쪽에 만만치 않은 먹구름이 끼어 있다. 보다 넓게 보자면 은행에 비해 자본시장의 각종 자료들은 잘 정리되고 있지 않다. 중앙은행의 관심과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심층 연구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의 연구활동은 상당한 위력을 가진다. 중앙은행의 권위가 실리는 점도 크지만, 제반 금융시장을 아우르는 넓은 시야 또한 큰 도움이 된다. 회사채시장과 신용평가에 대한 중앙은행의 새삼스러운 관심을 진심으로 고맙고 반갑게 생각하는 이유다.
윤영환/Credit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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