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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연못 속에서 키울텐가 [강종구의 Question]

강종구 기자공개 2013-11-26 10:02:00

이 기사는 2013년 11월 22일 17:1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2005년 10월 경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채 발행시장이 올스톱되고 유통시장이 요동을 치는 일이 발생한다. 특히 자산운용사에서 여전채(카드사나 캐피탈사들이 발행한 채권) 매물이 폭탄처럼 터져 나오면서 금리가 수직상승한다.

예고도 없이, 준비할 시간도 없이 금융시장은 일순간 혼란에 빠졌다. 카드사와 캐피탈사의 자금운용 담당자들은 시쳇말로 똥줄이 탔다. 여전사는 은행처럼 기업이나 개인에게 여신을 제공하지만, 은행과 달리 수신기능이 없어 자금조달을 전적으로 채권 발행에 의존하는 구조. 자금줄이 곧 생명줄인 셈인데, 어떤 사고도 조짐도 없이 문득 생명줄이 막혀 버렸으니 당하는 여전사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머니마켓펀드(MMF)에 대한 익일 환매 조치가 트리거였다. 필요할 때는 즉시 인출할 수 있는 매력이 반감되자, MMF에서 기관 자금이 썰물처럼 빠졌고 자산운용사들은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들고 있던 여전채를 팔아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정부가 운용하는 건교부 펀드마저 환매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대부분 카드회사와 캐피탈회사가 목숨이 위태로울 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그 때, 홀로 유유자적한 곳이 있었다. 국내 여전사 중 자산규모와 채권 발행 잔액이 단연 최대, 최다인 현대캐피탈이었다. 당연히 MMF에서 던진 채권 물량도 가장 많았다.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그런데 혼자 멀쩡했다.

현대캐피탈의 재무라인이 그해 봄부터 준비한 위기 대응 계획(Contingency Plan)이 회사를 살렸다. 차입선 다변화를 위해 해외 채권시장 개척에 나선 지 불과 6~7개월 만에 터진 사고였지만, 국내 조달이 막히자 미리 뚫어 놓은 해외 파이프라인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무리없이 융통할 수 있었다.

현대캐피탈이 해외로 눈을 돌린 건, 어느 애널리스트로부터 "당신들은 연못 속의 고래"라는 조언을 귀담아 들었기에 가능했다. 국내 여전채 중 30%는 현대캐피탈 채권이었다. 표현 그대로 고래였다. 그러나 국내 채권시장의 투자자 기반은 고래가 살기에 충분히 넓지도 깊지도 않았다. 물이 조금만 말라도 고래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몰살할 수 있었다. 고래가 살아갈 생태계가 아니었다.

차입수단이 한 곳에 집중될 경우 예상치 못한 이벤트리스크를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한 현대캐피탈은 곧바로 해외차입 다각화 전략에 돌입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제2금융권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본드 유로본드 링기트채권시장 양키본드시장 스위스프랑시장 등 주요 채권발행시장을 최단 기간에 완등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지금은 글로벌 채권 투자자에게 가장 유명한 한국의 발행사가 됐다.

맑은 날 우산을 준비한 이 전략은 2008~2009년 금융위기 때 또 한번 빛을 발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지만, 금융위기의 태풍에 GM 포드 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메이커들이 추풍낙엽처럼 추락할 때 현대자동차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가지 많은 이유가 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왔던 현대캐피탈의 오토파이낸싱이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2005년부터 마련한 우산이 비오는 날 태풍을 피할 수 있게 한 것은 물론이고 현대차그룹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는 힘이 된 셈이다.

정부는 2015년부터 여전사의 해외차입 비중을 20% 이내로 제한할 방침이다. 아마도 국내 여전사들의 리스크보다는 거시경제적인 리스크, 이를 테면 과도한 외화차입의 부작용으로 금융시장이 붕괴된다거나 환율이 지나치게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일 것이다.

이 역시 의미가 없다 할 수 없고 효과가 없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차원에서 세워야 할 위기대응 전략은 금융시스템이 외부 충격에 잘 견딜 수 있도록 정비하고, 국내 금융시장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것이 첫째이고,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고 외국과 통화스왑을 맺는 것 같은 최후의 보루(last resort)를 마련하는 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여전사에게 차입전략이란 곧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캐피탈이 됐든 신한카드가 됐든 다르지 않은 모두의 고민이고, 그 고민은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여전사를 비롯한 국내 금융회사들이 금융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든다면 오히려 정부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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