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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시의 신용이슈 [Credit View]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공개 2013-12-03 10:23:10

[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3년 12월 02일 15:2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중세 시대, 예루살렘 지역의 정정이 불안해지면서 성지 순례자들이 이슬람 세력의 핍박을 받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교황이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을 전면 금지한다. 일종의 경제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당장 중계무역에 크게 의존하던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국가들이 큰 타격을 받는다.

교황의 권위에 맞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탈리아 상업도시국가들은 묘수를 찾는다. 그리스 연안과 섬들에 산재한 식민도시들이 이슬람 지역과 교역하고, 이렇게 들여온 물자를 이탈리아 상업도시들로 넘기는 간접교역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엄연히 기독교도이니 교황의 교역 금지령을 어긴 것이 아니다. 또한 식민도시들에게까지는 교황의 통제가 미치지 않았다. 이렇게 명목상의 대리인(Proxy)을 활용한 간접교역도 굳이 따지자면 교황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겠지만, 교황청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교황의 명령을 따른 것이고, 또 나름대로 로비도 있었을 것이다.

원재료 가격의 마술

국내 봉제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동남아 등지에 현지공장을 세웠다. 국내에서 원자재를 100% 조달하여 동남아 현지공장에서 가공과정을 거쳐 미국 등지로 수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재를 한국에서 전량 공급하는데도 국내 본사의 원자재 수출금액과 현지 생산법인의 원자재 수입금액이 큰 괴리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두 금액이 같을 수는 없다. 운송비와 관세 등이 부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을 넘어서 큰 금액 차이가 있다면 좀 다른 이슈가 된다.

알고 보니 홍콩의 Paper company를 중간에 끼워서 원자재 가격을 다시 설정하는 것이었다. 송장(Invoice)을 다시 작성(Re-Invoice)하는 무역방식이란다. 동남아 국가들이 이익송금을 억제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원자재 가격을 높여서 미리 이윤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름 합리성도 있었지만 분명히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미국의 쿼터축소로 경기가 악화되어 본사와 현지법인이 모두 폐업했을 때, 홍콩의 페이퍼 컴퍼니에 쌓인 돈은 행방이 묘연했다.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1990년대 중반, 부산의 신발산업이 혁제 운동화의 고급화를 통해 재도약하고 있었다. 기업들의 매출과 이익이 모두 개선되었지만, 다시 경쟁이 심화되면서 점차 실적이 하락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유독 꾸준히 좋은 실적을 기록하는 회사가 하나 있었다. 비결이 궁금했다. 이리저리 자료를 맞춰보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화의 고급화는 소재의 고급화를 의미했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혁제 운동화 제조업체들의 매출 대비 원재료비 비중이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이 회사만은 오히려 원재료 비중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혁제 운동화 제조업체와 마찬가지로 미국 유명 브랜드의 하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품가격의 차별화와 운용효율성의 개선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였다. 결국 원자재 도입경로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위장계열사가 원자재를 구매하여 훨씬 낮은 가격에 본사로 넘긴 것이었다. 위장계열사는 대규모 적자가 불가피했지만, 본사는 좋은 실적을 기록하여 금융기관의 신용을 끌어올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자금의 상당 부분은 다양한 경로로 위장 계열사에 흘러가 손실 보전에 쓰이고 있었다.

중간고리와 운전자금

프락시를 통한 가격 조작은 쉽게 포착되고 오래 지속하기도 어렵다. 보다 고급스러운 방식은 운전자금의 차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A사가 판매효율성 개선을 위해 판매전문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판매회사는 대주주 또는 경영자가 출자한 회사지만 판매수수료는 필요경비 수준에 그쳐서 별로 이목을 끌지 않는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A사는 종래 판매처와 90일 결제조건으로 거래하고 있었고, 새로 설립된 판매회사도 동일 조건으로 판매처와 거래한다. 그리고 A사와 판매회사의 결제조건은 120일로 정했다고 해보자. 이런 조정은 그리 눈길을 끌지 않는다.

A사의 매출채권은 1/3이 증가하고 판매회사는 그만큼의 자금을 확보하게 된다. 연간 매출액의 1/12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판매회사는 이 자금으로 실질적 모기업이었던 A사의 지분을 매입하여 A사의 지주회사로 변신할 수도 있다. 대주주의 지배구조 개선은 물론이고, 주인 없는 회사의 경우에는 경영자가 지배주주로 변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판매전문회사뿐만 아니라 구매전문회사를 통해서도 같은 구도의 그림이 가능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A사의 매입채무가 줄어드는 모양이 될 것이다.

SPC와 규제차익

한동안 광풍을 일으켰던 건설PF가 관계자들의 관심을 끈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시행사는 사업기회를 향유할 수 있었고, 시공사는 부채의 부외화(off balance)와 함께 대기업에 대한 지역사회나 지자체의 역차별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금융회사들은 보다 높은 금리를 수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잘 알려진 이유 이외에 특히 은행이 누리는 PF대출의 강점이 있었다. 건설PF는 대기업인 시공사의 신용에 기초하지만 공식적인 차주는 어디까지나 중소기업인 SPC였다. 따라서 시공사에 대한 대출에 비해 건설PF는 동일인 여신한도나 중소기업 의무대출비율 등의 규제기준을 관리하는데 유리했다. 규제차익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 ABCP와 신탁의 연결고리가 관심을 끌면서 다양한 규제의 도입과 강화가 모색되고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불완전판매 이슈에 집중되고 있고, 투자자 측면에서의 유인은 간과되고 있다.

투자자가 대형 기관투자가인 경우에는 동일인 투자한도 이슈, 투자자가 개인투자자인 경우에는 사모채권의 간접분매 이슈 등 규제차익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형 신용이슈는 대개 금융의 극단적인 쏠림으로부터 시작되고, 이러한 쏠림은 많은 경우 규제차익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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