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02월 06일 19: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큰 사고가 터져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면 종종 희생양이 필요하다. 잘못에 비해 과도하게 무거운 벌을 받거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죄'로 둔갑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지나쳤던 과거의 과실을 몰아서 단죄하는 일도 허다하다.동양그룹이 무너진 후 국내 신용평가 3곳(한국기업평가, NICE신용평가, 한국신용평가)은 최근까지 두 달 동안 금융감독원의 '아주 특별한' 특별검사를 받았다. 동양그룹 붕괴라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고, 20일로 예정했던 검사 기간이 세 배로 늘어나 '특별히' 길었다. 또 정상적인 업무수행에 상당한 지장을 받을 정도로 강도가 매우 높았던 '특별히' 힘든 검사였다.
신용평가사에 대한 특별검사는 동양그룹 사태에 대한 금융당국의 대응 방안 중 하나였다. "동양그룹이 제출한 자료를 제대로 평가했는지, 제출된 자료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꼼꼼히 살피고 신용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신용등급을 부적절하게 매긴 사실이 있으면 제재를 가하게 될 것이다" 이게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검사의 이유였다.
동양그룹 사태로 인한 투자자들의 피해가 천문학적인 것을 생각하면 신용평가에 대한 점검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신용평가사들이 동양그룹의 회유나 압력에 굴복해 신용등급을 고의로 늦게 내렸는지 모른다. 동양그룹과 '부정한' 거래-이를테면, 등급을 내리지 않는 조건으로 향후 수주를 확약했거나 접대를 받는 등-가 없었다고 믿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등급을 매기는 과정에 신용평가사의 부정이나 중대한 과실이 있었는지 살피는 것은 금융감독당국의 당연한 임무일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은 전선(戰線)을 전방위로 확대했다. 동양그룹 뿐 아니라 경남기업 웅진그룹 STX그룹 등 최근 신용이벤트가 발생한 모든 곳이 집중 점검대상에 포함됐다. 그 외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된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용평가사들은 컴퓨터 서버를 열어 사실상 사내 모든 정보를 공개했고, 개인용 컴퓨터를 압수 당했다. 금융감독원은 동양그룹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일상적인 업무보고 중 미심쩍은 것이 없는지 그야말로 샅샅이 뒤졌다. 신용평가 수주 등 영업과 관련된 내부 문서는 물론이고 직원들의 이메일까지 들여다 본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의 특별한 검사는 상당한 소득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수주과정에서 이른바 등급쇼핑의 사례를 찾아냈고, 신용등급의 사전 확약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번 검사가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동양그룹 사태를 무마하고 싶은 금융당국이 신용평가업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잘못한 게 있으면 죄를 묻기 위한 검사가 아니라 죄를 묻기 위해 잘못을 찾아내는 검사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단순한 음모론이길 바라고 있지만, 표적검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기는 하지만, 특별검사의 뒷 얘기를 들을수록 우려를 넘어 공포가 엄습해 오는 건 왜일까. 이러다 금융시장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프라 하나가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는 법이고, 잣대의 엄격함에 따라 먼지의 양은 달라지는 법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털어서는 안되고, 상황에 따라 잣대의 엄격함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다. 이번 신용평가사에 대한 특별검사는 과연 적절했던 것일까.
신용평가사들은 상당한 내홍을 겪었거나 겪고 있다. 상당 수의 임원이 직장을 잃게 됐고, 검사를 빌미로 내분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에 서로 책임을 미루며 반목하는 일도 벌어졌다. 회사 입장에서나 개인 입장에서나 상처는 깊어 보인다.
돌이켜 보면,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설립 이후 지난 30년 동안 늘 동네북을 면치 못했다. 미숙아였던 2000년 이전이나 놀라울 정도의 질적 성장을 이룬 지난 15년이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잘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잘한 건 보이지 않고 잘못한 건 잘 드러나는 게 신용평가이니, 신용등급을 올려도 욕을 먹고 내려도 욕을 먹는 건 어쩌면 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국내 신용평가업계의 생태계는 매우 척박하다. S&P나 무디스처럼 시장에서 성장해 평판권력을 갖게 된 게 아니라 정부의 정책에 의해 탄생하고 그 안에서 성장한 죄로, 관치에서 자유로왔던 적이 없다. 금융시장의 교통순경이지만 당국이 허용하지 않으면 질서를 잡을 수도 없고, 금융시장의 언론이라고 하지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맞닥뜨린 가장 큰 한계는 어쩌면 관치에 길들여져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생력의 상실'인지도 모른다.
검사는 어차피 한 것이고 결과는 어쨌든 나올 것이다. 앞으로 남은 일은 매듭을 잘 짓는 것이다. 지난 잘못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일벌백계로 다스려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으로 끝낼 것인지, 국내 신용평가사가 제대로 된 와치독(watchdog)으로 거듭날 수 있는 지혜까지 모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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