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4년 03월 29일 15:4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99년 대우그룹의 해체는 자산운용업계에 100조 원짜리 폭탄이었다. 그 해 7월 255조 원에 달했던 투신사 수탁고는 대규모 환매사태로 불과 10개월 만에 157조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투신사를 이탈한 자금은 고스란히 은행 예금으로 흡수됐다. 아니… 은행으로 돌아갔다.대우채 환매사태는 아마도 한국의 자본시장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페이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은행'이라는 하나의 바퀴로 불안하게 굴러가던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자본시장'이라는 튼튼한 바퀴 하나를 더 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한국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무려 5개 은행이 퇴출되는 등 은행업계가 혹독한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휘말리자, 시중자금은 은행을 빠져나와 급격히 투신사로 이동했다. 때맞춰 현대투신의 'Buy Korea' 열풍까지 불면서 투신사의 수탁고는 1년 반만에 87조 원에서 255조 원으로 불었다. 전체 금융권 수신 중 70%에 달할 만큼 압도적이었던 은행의 비중이 줄어든 만큼 투신사의 비중은 높아졌다. 고작 16%였던 것이 무려 37%로 말이다. 최소한 양적인 측면에서는 자본시장이 은행의 보조자에서 동반자로 올라선 것이다.
은행에 묶여 있던 돈이 투신사로 이동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개인들이 예금을 깨고 펀드를 샀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식과 채권에 투자했다는 말이다. 수 많은 기업이 은행의 단기대출에서 벗어나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거나 채권을 발행해 장기 자금을 조달했다는 이야기다. 증권사는 주식과 채권의 발행을 주선하고 개인들에게 펀드를 팔아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얻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외환위기는 재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물경제와 금융경제를 선순환으로 이끌 선물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시장은 그 선물(?)을 너무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증권사와 투신사는 돈을 버는 데만 혈안이 돼 있을 뿐 자신들의 본분을 잊었다. 관치금융에 중독된 당국은 시장의 규율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선물을 소중히 다뤄주지 않았다.
1999년 7월 19일 대우그룹이 사실상 부도를 선언하자 펀드에 대한 고객들의 환매 요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부의 헛발질이 종합세트로 등장한다. 8월에는 펀드 환매를 제한하면서 개인과 법인에게 환매를 90일 연기할 때마다 대우채의 원본을 50%에서 최대 95%까지 보장해 주겠다고 발표한다.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실적배당상품에 원금을 보장하는 불법을 정부 스스로 자행한 미봉책이었다.
시장은 안정을 찾기는커녕 80%의 원금보장이 이루어지는 11월에 대량 환매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금융대란설이 확산된다. 정부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손실'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라는 망령인 것을…
그뿐 아니다. 채권시장선진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시가평가제의 실시는 유보했다. 최소한의 시장규율 원칙도 포기한 것이다. 공적자금이나 마찬가지인 채권시장안정기금이 막대한 규모로 조성됐다. 투신사가 펀드 환매를 위해 채권을 팔면, 채권시장안정기금이 일단 사들이게 한 뒤 애꿎은 은행을 동원해 그 채권을 재차 인수하게 했다. 공적자금의 투입대상이 될 수 없는 투신사에는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을 경유하는 방법으로 국민의 혈세를 지원했다.
대우그룹이 발행한 채권과 CP를 편입한 펀드는 110조 원에 달했다. 약관을 위배해 대우채를 사들인 펀드매니저들도 있었고, 대우채와 CP로 80%를 채운 펀드도 있을 정도로 탈법이 판을 쳤다. 자전거래나 파킹거래는 애교에 불과했다. 자산운용업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투자자들은 더 이상 펀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100조 원이 떠나고 자산운용업의 암흑시대가 시작됐다.
10여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의 디레버리징과, 발행잔액이 80조 원에서 200조 원으로 늘어난 회사채시장의 팽창은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모습과 흡사하다. 위기는 단기자금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그로 인해 자본시장의 필요가 부각되는 과정이 말이다.
기회는 다시 자본시장을 찾아 왔지만, 자본시장은 이번에도 헛물만 켜고 말지 모르겠다. 대우그룹은 사라지고 없지만, 건설사들의 연쇄 도산과 STX그룹, 웅진그룹, 동양그룹의 해체라는 도전을 만난 후 정부와 시장은 또 다시 헛발질의 연속이다. 채권시장안정기금, 회사채신속인수제 등 약발은커녕 시장을 후진시키기만 하는 저 미련한 '비정상화' 방안들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단 말인가.
결정적으로 지금 자산운용사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시냇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개인과 기업의 자금이 펀드로 흘러 들어야 중소·중견기업이 발행하는 회사채를 사 줄텐데, 자산운용사들은 철저하게 대형 연기금의 돈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러니 회사채 시장이 200조 원으로 커져도 죄다 AA급 기업들의 잔치일 뿐이고, 돈 많은 일부 연기금과 보험사들의 리그일 뿐이다.
강소기업이 살고 창조경제가 성공하려면 대형 회사채 펀드가 답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부는 정부대로 금융투자업계는 업계대로 뻔히 보이는 그 길을 가지 못할 이유만 찾고 있다. 한쪽에선 '중소기업이 채권을 발행해도 사줄 투자자가 없다'고 하고 다른 쪽에선 '회사채펀드를 만들어도 살 수 있는 채권이 없다'는 식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순환논법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그렇게 바보같은 닭타령 달걀타령을 하는 사이 미국의 JP모간자산운용은 자신들의 하이일드펀드를 들여와 무려 8000억 원어치나 국내 투자자들에게 팔아 먹었다. 증권사와 은행의 프라이빗뱅커들은 자신들의 부자 고객들을 상대로 '저금리 시대에는 하이일드펀드가 딱'이라며 이 펀드를 열심히 팔아줬다. 분리과세 혜택도 없고, 공모주 우선배정도 되지 않는 이 펀드를 말이다. 도대체 없기는 뭐가 없고, 안되기는 뭐가 안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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