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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View]토종들의 경쟁력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공개 2014-04-22 08:00:00

[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4년 04월 21일 10:2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카드위기 당시의 어느 날, 경제학 교수들 연구모임에서 카드위기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미국 카드사는 자금의 20% 정도를 예금으로 조달한다는 설명에서 사단이 났다.
"카드사는 여신전문금융회사인데, 어떻게 예금을 받아요? 말도 안 돼!"

우리의 금융체계가 상당부분 미국을 따라가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일례로 우리나라 금융회사는 당국의 인허가를 받아야 비로소 영업을 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체로 자유롭게 금융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 대신 영업규모가 커지면 그에 따라 규제의 강도가 높아진다. 심지어 전산설비도 없고, 조직 구성원도 한 사람뿐인 증권사도 가능하다고 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기 보다는 그냥 문화와 시장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종종 엉뚱한 논리에 휘말려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2013년 미국 회사채 발행시장에서 하이일드(BB 이하 투기등급 채권)의 비중은 24%에 달했다. 중소기업에 대대적으로 자금이 공급되면서 미국 산업의 경쟁력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반면 우리나라 하이일드 회사채시장은 갖은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회사채시장의 양극화는 결국 산업의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펀드의 회사채투자 활성화 여부가 하이일드 회사채시장의 Boom과 Doom을 갈랐다고 생각한다. 펀드는 기본적으로 포트폴리오 투자를 한다. 펀드의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하이일드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 마련이다. 미국 회사채시장에서는 펀드의 비중이 크게 늘었지만 한국은 줄곧 제자리 걸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해석은 그리 인기가 없다. 회사채펀드를 활성화해야 회사채시장 양극화도 해소된다는 주장은 반향을 얻지 못한다. 우리 펀드들의 실망스러운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회사채펀드에 대한 규제강도가 워낙 높아서 도무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 금융회사가 우리 투자자에게 하이일드펀드를 1조원 이상 팔아도 우리 기관들은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합리적인 설명이 막히면 그럴싸한 가짜 해석이 등장하는 법이다. 우리 하이일드 회사채시장의 활성화가 어려운 이유는 순전히 우리의 신용평가가 엉터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하이일드 기업들은 그래도 투자할 만하지만 우리나라 하이일드 기업들은 정말 엉망이어서 도무지 투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어지간한 투자등급 회사들이 미국에 가면 대개 하이일드 아니냐, 아니 그만도 못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분히 자학적인 시각이고 일종의 마녀사냥일 뿐이다.

재무지표로만 보자면 확실히 수준 차이가 있다. 미국의 BB 등급 기업들 재무지표를 보면 우리의 어지간한 A등급 기업들에 비견할 만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략 3~4 Notch 정도 차이를 두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금 더 나가면 글로벌 평가사가 우리 회사채시장에서 직접 진출하면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대적인 등급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물론 언젠가는 일본 회사채시장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재현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우리의 신용시장은 글로벌시장과 분리되어 있고 신용도에 대한 눈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용등급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절대 지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의 신용도에 대한 판단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용도는 그 시장에서의 자금조달 가능성과 같은 의미다. 선진시장일수록 자금 공급자의 눈높이가 올라간다. 개도국에서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금조달이 가능한 기업도 선진시장에 나가면 자금조달이 벽에 부딪힌다. 시골 학교 우등생이 대도시 학교로 전학하여 고전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교과서나 커리큘럼 같은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 전반적인 학력수준이라는 상대적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도국 A등급 기업이 선진시장에서 BB가 되는 것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신용시장의 이중성은 글로벌 평가사의 사업전개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개도국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경우 신용등급의 이원운용이 불가피한데 자칫 혼선을 야기하여 신용등급의 권위가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헷갈리는 것은 우리나라 식자들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글로벌 평가사들은 일부 개도국에서 로컬등급을 운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회사를 통한 진출을 선호한다. 물론 일본 금융시장처럼 선진시장과의 격차가 좁혀지면 당연히 단일 등급체계로 직접 진출할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빠르게 선진 금융시장과의 격차를 좁혀가고 있지만 신용시장에서의 간극은 아직도 엄청나다. 물론 언젠가 그 간극은 메워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위에서 설명한 신용등급의 이중구조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같은 결과라도 어떤 과정을 통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하나는 주체적으로 간극을 좁히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핵심적인 과제가 바로 하이일드 시장의 활성화다. 당장은 답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 시장의 역량을 감안하면 비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로를 헤매던 '회사채 발행절차 정상화'도 시장의 뜻이 모아지니 자리잡는 것이 한 순간이었다. 우리 회사채시장의 가장 취약한 고리인 하이일드 시장도 어느 순간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 회사채시장은 다시 봄을 열어갈 수 있다. 당연히 토종 IB나 평가사들도 글로벌 회사들과 함께 당당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사채시장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지고 증권사들은 해외채권 판매에나 매달리다가 독자적인 채권 발행자 기반이 무력화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에게 토종의 존재이유가 사라진다. 글로벌 IB와 평가사에게 시장을 모두 내어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일본 증권사와 평가사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윤영환 서울신용평가 평가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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