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신용평가는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단지 신용투자의 잣대에 그치지 않고, 산업/기업의 펀더멘털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늘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더벨을 통해 마치 지각 아래 거대한 멘틀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다양한 크레딧 전문가의 뛰어난 직관을 감상해 보십시요.
이 기사는 2015년 03월 13일 10:0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나이를 먹고, 더 넓은 세상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신용평가의 시각도 금융환경이 고도화되면서 점차 달라지기 마련이다. 평가사들이 고집스럽게 과거의 틀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스스로 나서서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가사야 그럴만해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자본시장은 그로 인해 발전이 늦어지고 위기에 노출되기도 한다.대표적인 것이 단기신용평가의 논리다. 우리나라의 신용평가는 1980년대 중반 당국의 주도로 도입되어 민주화와 금융자유화를 겪으며 틀을 잡았고,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을 계기로 도약했다. 평가상품으로 보자면 단기(CP)신용평가에서 출발하여 장기(회사채)신용평가로 확장하였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구조화금융(ABS)으로 평가의 지평을 넓혔다.
2001년 채권시가평가 도입 전, 우리의 신용평가 시장은 금융시장의 자발적 수요가 아니라 당국의 규제요건 도입과 완화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CP평가 의무화가 바로 우리나라 신용평가 서비스의 시작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회사채평가까지 의무화되었을 때 장·단기 평가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대두되었지만 대략 분석기간의 차이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신용평가사들이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극 수용한 측면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단기금융시장의 활성화와 유동성 이슈가 등장하면서 이전에는 우리 시장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단기신용이슈 또는 단기신용평가의 의미가 현실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론적으로 신용평가는 평가대상 유가증권의 만기와 무관하게 3~5년의 기간적 관점(Time horizon)을 유지한다. 경기 사이클 하나를 오롯이 지켜보며 펀더멘털을 판단하고, 그 정도의 기간에 대한 전망을 신용등급에 반영한다는 것이다(Rating through the cycle).
만기와 신용등급은 무관하다는 의미다. 시장은 어차피 기간별 수익률곡선으로 잔존만기와 가격의 관계를 관리한다. 만일 평가사들이 만기 경과에 따라 신용등급을 바꾼다면 시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용평가, 나아가 자본시장에서의 단기이슈는 무엇인가? 신용분석 대상기간이 아니라 투자자금의 성격이 핵심이다. 장기보다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낮은 단기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지급확실성에 대한 민감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당장 직원들 월급 주고, 세금 내고, 거래처에 결제할 자금이다. 자칫 자금부족이 발생하면 큰 사단이 나는 자금이다.
단기의 회계적 의미는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자본시장 금융상품에서 단기의 의미는 이렇게 지급 확실성이 매우 높아야 한다는 아주 절박한 것이다.
원래 단기금융상품(대표적인 것이 MMF)은 당좌예금(무이자) 고객을 대상으로 개발된 자본시장 상품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가 유인이지만 지급확실성은 그에 선행하는 필요조건이다. 단기금융상품은 유동성이 높은 국채와 단기유가증권을 주로 편입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은행 예금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입증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몇 겹의 안전장치가 고안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단기신용등급이다.
간단히 신용등급 시스템만 따라가보자. 우선 투자대상 기업의 펀더멘털에서 장기신용등급이 나오고, 이에 유동성 정책과 보강 등에 대한 판단이 더해져 단기신용등급이 결정된다. 이 신용등급들은 펀드의 자산편입기준으로 사용되고, 이렇게 구성된 펀드는 자산 포트폴리오 외에 몇 가지 평가요소가 더해져 펀드신용등급으로 투자자에게 소개된다. 장기신용등급이 기본 등급이고 단기신용등급과 펀드신용등급은 플러스 옵션 등급인 셈이다.
신용평가를 도입할 때 우리는 이런 선진금융시장의 구조와 관행을 잘 몰랐다. 단기금융상품의 대표격인 MMF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우리나라에 신용평가가 도입되고도 10년이 지난 1996년 9월이었다. 우리나라에서 MMF의 유동성 이슈가 처음 부각된 것은 2003년 3월 카드위기 당시의 MMF 환매사태였다. 위기 직후인 9월의 MMF 자산편입기준 정비는 유동성 위기의 교훈이 제도화된 대표적 사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은행 단기외화채무와 증권사의 콜자금 등에서 유동성 이슈가 불거졌지만 당국의 신속 과감한 대응으로 큰 무리 없이 봉합되었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 가지 부작용이 남았다. 유동성 이슈에 대한 시장의 학습이 미뤄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기 이슈를 그저 회계적 기간의 이슈로만 이해하고 지급확실성의 관점에서 치밀하게 접근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단기신용평가를 장기신용평가의 하위 단계로 이해하려는 억지스러운 태도 또한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구조적 취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제도 몇 가지를 도입한다고 그런 취약점들이 한 순간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문제점에 대한 인식조차 불완전한 상황에서는 오죽 하겠는가?
대표적인 것이 유동성리스크 관리의 중요성 확대에 대응하여 유동성비율 분석 또는 유동성 갭 분석을 도입한 것이다. 개념은 간단하다. 금융위기 상황에서 설령 유동부채의 차환율이 낮아지더라도 적절히 유동자산을 회수(현금화)하여 대응할 수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정기간(1,3,6,12개월 등)을 정하여 유동자산와 유동부채의 비율을 보는 것이 유동성비율 분석이고, 유동자산과 유동부채의 차액을 살피는 것이 유동성 갭 분석이다. 빌린 돈과 빌려준 돈의 짝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짝 맞추기는 그리 견고하지 않다.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더라도, 위기상황에서는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서 빌린 돈을 못 갚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더욱이 이런 상황전개(대손 발생 또는 연체율 상승)는 채권자들을 자극하여 회수압력을 높이고(차환율 추가 하락) 상황은 급속히 악화된다.
카드위기 당시 카드사들이 유동성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현금서비스 사용한도를 줄이자 상당한 규모의 현금서비스가 회수되지 않고 연체로 넘어가 버렸다. 카드사의 연체율이 급등하고 카드사에 대한 유동성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전형적인 위기의 악순환 고리에 빠진 것이다. 회전형 자산(revolving asset)의 유동성 이슈를 확인한 사례였다.
은행 Usance(연불수입금융)는 은행이 외화를 차입하여 원자재 수입자금으로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무역금융이다. 2008년 금융위기 상황에서 은행들의 단기외채 차환이 어려워지는 난감한 상황이 초래되었지만 Usance는 제대로 회수할 수 없었다. Usance를 가장 많이 쓰는 정유산업의 경우로 보자면, 무리하게 Usance를 회수하면 당장 원유 수입 차질로 엄청난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결국 당국이 비상한 수단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는 트레이딩 계정의 근본적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 하나가 거래의도의 편의적 해석에 대한 것이었다. 유동성비율을 계산할 때 RP대상 회사채는 잔존만기를 적용하지만, 트레이딩 목적으로 보유하는 회사채는 만기를 1주일로 처리할 수 있다. 나름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유동성 리스크 관리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접근이다. 우리나라 증권사들의 유동성비율은 평균 140% 정도로 양호한 수준이지만, 보유 회사채의 규모(2014년말 당기손익인식 회사채 46.8조원)를 감안하면 편안하게 바라볼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결국 유동자산 각각의 성격을 따져서 적절한 할인율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당국도 금융위기 이후 외화유동성비율은 신용도 등을 감안하여 계산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Usance는 변함없이 유동성을 100% 인정하도록 했다.
전반적으로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우리 시장과 평가사의 경계심은 아직 그리 높지 않다. 우리나라와 미국 제조업의 지표들을 비교해보면 이제 비슷해진 부채비율과 달리, 유동성차입금 비중은 여전히 크게 차이가 난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미국 16.1%, 우리나라는 50.2%였다.
물론 이를 두고 우리 기업들의 유동성리스크가 미국보다 훨씬 크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최근 사례에서 보듯이 여러 차례 유동성 이슈가 위기의 문턱에서 당국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역사적으로 관찰된 유사시 정책당국의 역할과 그에 대한 기대도 하나의 구조이고 당연히 신용도 판단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당국의 개입에 의존하는 구조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다. 우리 경제의 성장과 선진화, 개방화를 감안하면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환경이 달라지면 신용이슈도 변하지만(As market evolve risk change) 가이드라인은 큰 위기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바로 잡히는 경우가 많다. 소를 잃고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다. 막대한 학습비용을 치르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간혹 외양간 고치다가 뜻하지 않게 소가 상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그냥 쓸데없이 번거로운 일을 벌였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또한 아무리 예방조치를 잘해도 소도둑을 모두 막지는 못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리스크와 대응방식에 대한 시장의 성숙한 공론이다. 최근 독자신용등급 도입을 앞두고 유동성리스크에 대한 평가사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평가사들이 제기하는 담론이 우리 시장의 집단지성을 움직여 선제적 위기관리라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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