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신뢰가 우선, 지나친 경쟁입찰 득보다 실" 호바트 리 엡스타인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외이사
민경문 기자공개 2016-06-02 09:05:00
[편집자주]
진짜 고수는 공력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비록 지금은 강호를 떠나있지만 한때 자본시장을 주름잡던 실력자들은 곳곳에 숨어 있다. 머니투데이 더벨은 이들을 찾아 국내 캐피탈마켓을 둘러싼 통찰력 있는 '한 수'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 기사는 2016년 05월 31일 08:4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에서 대형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딜이 있을 때마다 주관사 선정은 초미의 관심사다. 의향서(LOI)를 제출하고, 프레젠테이션(PT) 심사를 하는 과정 등이 언론을 통해 생중계 된다. 승자와 패자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입찰의 묘미는 배가된다. 의사 결정권자인 오너 일가 및 최고 경영진으로서는 IB들에 대해 제대로 '갑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다."한국 대기업들은 자본시장을 활용한 자금 조달에서 주관사를 왜 매번 입찰로 뽑을까요?" 엡스타인 이사의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입찰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기자로서는 당황스러웠다. 대기업인 만큼 공정성을 답보하고, 최적의 조건을 제시하는 주관사를 뽑기 위해 입찰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엡스타인 이사는 "공기업도 아닌데 굳이 공정성을 도모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주관사 지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입찰 자체는 쇼잉(showing)일 수 있다는 것. 공정성을 지킬 필요는 없지만 공정하게끔 보이기 위해 입찰을 진행하는 것뿐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국내 기업들이 소신껏 주관사를 선정하면 입찰을 건너뛸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입찰은 경쟁이라는 좋은 의미도 있지만 발행사와 증권사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관계를 모두 '허당'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엡스타인 이사는 주관사 채점표에 '기존 비즈니스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가산점이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IB입장에서는 평소에 아무리 '고객관리'를 잘 해 봤자 경쟁사와 차별화를 도모하기 어렵다. 매번 입찰 때마다 '거의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는 " 외국의 대형 글로벌 기업이 자금 조달 과정에서 한국처럼 주관사를 오픈(open) 입찰로 뽑는 사례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설사 입찰을 하더라도 2~3곳 정도를 불러 아주 제한적(limited) 경쟁을 유도하는 수준이라는 것. 대부분은 평소에 발행사들과 꾸준히 관계를 쌓아온 핵심 파트너과 수의 계약 형태로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야 비밀 유지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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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국내 대기업들이 입찰을 진행할 경우 외국계 IB 헤드 상당수는 본사로부터 "그 동안 도대체 뭐했냐"며 질책을 받는다고 했다.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이유도 국내 기업과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하라"는 것인데 입찰을 하게 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 입찰제안요청서(RFP)는 회사 이름을 보고 주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대표로 있어도 큰 차이가 없다는 해석이다.
엡스타인 이사가 골드만삭스 한국대표 초기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한 공기업으로부터 국내 대기업 지분 블록딜 관련 RFP를 받았단다. 당시 골드만은 해당 공기업과 비즈니스 관계가 아주 적었던 상황. 엡스타인 이사의 전략은 '수수료 1억 원'이었다. 사실상 다른 외국계 IB로 주관사가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만큼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수수료를 낮추는 방법 외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해당 공기업의 고위 임원이 "제정신이냐"며 연락이 왔다. 다른 후보들이 수십억 원의 수수료를 제시한 상황에서 1억 원은 아예 '판'을 깨는 행위였던 것. 딜레마에 빠진 공기업은 '자격 미달'이라는 이유를 들어 제안 자체를 취소해줄 것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엡스타인 이사가 이를 수용하긴 했다.
국내 시장에서 수수료 후려치기 등 논란의 소지가 있을 만한 대목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기업의 지나친 경쟁 입찰 유도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비칠 수도 있는 사례였다. 그의 말에 100%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신뢰관계보다는 지나치게 수수료 등 비용절감에 집착하는 경쟁입찰에 대한 경종을 울릴 만한 주장으로 받여들여 질만은 하다.
주관사 입찰은 기업 입장에도 이득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기업이 자금조달에 여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모자를 때도 있다"며 "입찰을 하게되면 정말 사정이 어려울 때 IB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 이사는 "외국의 경우 평소 '재무주치의' 역할을 담당하던 IB를 일단 믿고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해당 IB 역시 이 같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국내 IB들이 진정한 신뢰를 쌓은 고객을 과연 몇이나 갖고 있는 지 반문했다. 엡스타인 이사는 "주요 입찰이 임박했을 때만 공들여 제안서를 만들고 PT를 준비하는 것이 전부"라며 "국내 IB들이 어드바이저(advisor)가 아닌 단순 브로커(broker)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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