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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재벌시스템]세계서도 관심 주는 LG그룹 '장자 승계'4대째 '소프트 랜딩', 구광모 회장 성과에 '주목'

박상희 기자공개 2020-06-10 08:00:03

[편집자주]

세계 최대 농업·식품회사인 카길은 비상장이고 가족지배 기업이지만 현재 가족이 경영하지 않는다. 세계적 플랫폼 기업 구글도 창업자들이 1선에서 모두 퇴진, 인도 출신 순다르 피차이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소유·경영의 분리 사례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은 태생적으로 소유·경영의 융합모델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고도 성장과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너경영 3·4세 시대에 접어들며 변화를 요구받는다.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배구조 뿐 아니라 이사회·내부통제·조직구성에 까지 영향을 줄 사안이다. '포스트 이재용 선언'은 곧 '포스트 재벌시스템'이다. 이재용 선언 이후의 재벌시스템, 나아가 4차산업혁명 이후의 재벌시스템을 조명해본다.

이 기사는 2020년 06월 05일 11:12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아무리 자손이 많아도 너는 맏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본시 맏이란 일이 고된 법이다. 맏이가 놀 새가 어디 있나. 묽은 걸 알고 된 걸 알아야 남을 다스려 나갈 수 있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전 회장이 평소에 장남 구자경 전 회장을 불러 앉혀 한 말이다. LG그룹의 경영권 승계는 독특하다. 분쟁 한 번 없이, 잡음 한마디 새어나오지 않고 4대 째 '장남 승계'를 이뤄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해외는 물론 '자식 대물림'이 일반적인 한국에서도 장남 승계만을 고집하는 방식은 LG그룹이 유일할 정도다.

구인회 전 회장은 본인이 주창한 '장자 리더십'이 1947년 창업 이후 반 세기가 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일각에선 구시대적 유물로 여겨지는 '유교적 리더십'이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LG그룹의 승계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걸 두고 아이러니라고 꼬집기도 한다. 장자 승계는 언제까지 유효할까. 4대 회장인 '구광모 시대'를 넘어서도 건재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장자 승계' 4대째 잡음 없이 완수

독일 함부르크에 1798년 설립된 바르부르크 은행의 2대 주인은 아들을 다섯 두었다. 장남인 아비 바르부르크는 열세 살에 부친이 사망하자 독일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금융회사를 비롯한 막대한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바르부르크는 유대인이었다. 유대교 문화에서 장자상속권은 절대적이다. 책벌레였던 바르부르크는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평생 책을 보며 공부하길 택했다. 실제로 그는 미술사가, 문화사가, 문헌학자이자 도상해석학의 창시자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가업 승계를 거부하고 책을 택한 바르부르크의 경우가 일반적이진 않다.

바르부르크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장자상속권 전통이 있는 유대인이 설립한 기업도 장자와 장손이 수 대에 걸쳐 기업을 물려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잘 알려진 로스차일드 가문도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장자상속권을 고집하진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뿌리는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태어난 1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이어도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저마다 유럽 각지에서 금융업을 일으키도록 했다. 아들 한 명에게 재산을 상속하기보다는 합심해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흥기를 이끌도록 했다. 로스차일드는 8대가 이어지면서 직계 자손이 200명을 훨씬 웃돌지만 여전히 끈끈한 단결력을 자랑한다.

LG가(家)는 여러 모로 유대인이 설립한 기업을 떠올리게 한다. LG가도 초창기 1~2대에서 자손을 많이 낳았다. 창업주 구인회 전 회장은 6형제 중 맏이였고 슬하에 6남4녀를 두었다. 구인회 전 회장의 장남인 구자경 전 회장도 3남2녀를 두었다. 회(會)자 돌림만 6명, 자(滋)자 돌림만 23명에 달할 정도다. 본(本)자 돌림은 구인회 전 회장 직계로만 11명에 이른다. 가족이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유교적 가풍 속에 여성은 경영에서 철저히 배제됐지만 남자형제를 중심으로 가족 경영을 이뤄냈다.

세계 여느 기업과 견줘도 독특할 수밖에 없는 LG그룹의 경영권 승계는 '장자 승계' 원칙에 있다. 맏이였던 구인회 전 회장은 장자와 장손이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유교적 가풍을 기업 경영에도 뿌리 내리게 했다.

유교 가풍엔 엄격한 위계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집안 행사 모임에는 '능성 구씨' 수십 명이 줄을 서는데, 이 자리에는 그룹 총수이자 3대 회장인 구본무 전 회장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어른들이 결정을 내리면 거역을 못하는 가부장적 가풍 속에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할 틈이 없는 셈이었다.

◇반발 없는 경영권 이양, 유교적 가풍의 힘

창업주 구인회 전 회장이 타계하자 차기 회장 선정 과정에 관심이 쏠렸다. 구인회 전 회장은 기업을 혼자 일구지 않았다. 형제들과 수십년 간 협력하며 회사를 키웠다. 구인회 전 회장 동생들이 사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회장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특히 구인회 전 회장을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첫째 동생 구철회가 차기 회장으로 세간에 회자됐다.

*역대 LG그룹 회장. 구인회, 구자경, 구본무, 구광모 회장(왼쪽부터)

구인회 전 회장은 1969년 12월 마지막 날 타계했다. 1970년 1월6일 열린 신년 시무식에 이은 그룹 전체 임원회의에서 구철회는 구인회 전 회장의 장남이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할 것을 제안했다. 장남 구자경 전 회장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회장 자리에 올랐다. 구인회 전 회장의 장자승계 원칙이 본인 혼자 생각에 머문 것이 아니라 형제와 가족 간 동의 하에 가풍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3대 구본무 전 회장으로 승계되는 과정도 비슷했다. 1995년 고희를 맞은 구자경 전 회장은 경영 은퇴를 선언하고 장남 구본무 전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넘겼다. 삼성이나 현대그룹과는 달리 철저하게 장남 승계를 지켰다. 이 과정에서 외부로 드러난 잡음은 일체 없었다.

LG가의 흔들림 없는 장자 승계 원칙은 구본무 전 회장의 양자 입적에서도 확인된다. 구본무 전 회장은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었는데 1994년 아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자식을 얻었지만 딸이었다. 대가 끊길 위기 상황에 놓이자 구본무 전 회장은 당시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 구광모 상무(현 LG그룹 4대 회장)를 양자로 입적하기로 했다. 2004년 당시 구광모 상무는 구본무 전 회장의 아들로 호적에 올랐다.

◇국민정서, LG그룹 경영권 승계엔 왜 너그럽나

이처럼 LG그룹은 유교적 가풍에 입각해 철저하게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이야기가 나온 게 2000년대 초반이다. 글로벌 LG로 성장한지 꽤 오래됐는데 아직까지 유교 이념에 붙들려 있는건 시대착오적이라는 시선도 있다.

중요한건 결과다. 철저하게 장자 승계 원칙을 지켜왔는데 4대에 이르도록 경영권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른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경영권 승계가 이뤄졌지만 국민 정서가 LG그룹에 관해서만큼은 관대한 이유 중의 하나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편법이 자행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LG 지분 8.8%의 지분을 상속 받은 구광모 회장을 비롯한 구본무 전 회장 자녀들은 국내 상속세 역사상 최고치인 9000억원이 넘는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이들은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해 성실하게 상속세를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눈으로 보면 장자 승계 원칙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국인 주주들이 장자 승계 과정에 비판이나 비난의 목소리를 낸 일은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엄격한 장자 승계 원칙 이행은 차기 총수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LG가에서 장자에게 경영권 승계라는 '특혜'만을 주지는 않았다. 철저하게 경영 수업을 거쳐 회장 자리에 오르게 했다. 오너일가라도 혹독한 경영훈련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만 경영자로 세우는 전통을 지켜왔다. 2대 구자경 전 회장은 45세 나이에 2대 회장에 취임했고, 3대 구본무 전 회장은 50세에 회장 자리에 올랐다. 충분히 준비가 된 이후에 총수 자리에 올랐다.

LG그룹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크게 어긋남 없이 안정적인 성장 궤도를 그려왔다. 장자 승계가 아직까진 실패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4대 회장인 구광모 회장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8년 6월 LG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구광모 회장은 불혹의 나이에 자산 규모 123조원의 회사를 이끌게 됐다.

1978년생인 구광모 회장의 나이를 감안하면 향후 경영권 승계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5대까지 장자 승계 원칙이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주지할 것은 외부에서 LG그룹의 경영권 승계 원칙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LG가에서 4대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장자 승계에 따른 별다른 부작용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장자 승계라는 유교적 메커니즘이 몇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할지는 철저히 LG가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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