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의 Money-Flix]보궐선거 결과를 미리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 <자산어보>영화 속 조선 후기 사회상에 투영된 2021년 한국의 모습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공개 2021-04-08 10:04:01
[편집자주]
많은 영화와 TV 드라마들이 금융과 투자를 소재로 다룬다. 하지만 그 배경과 함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참인 명제다. 머니플릭스(Money-Flix)는 전략 컨설팅 업계를 거쳐 현재 사모투자업계에서 맹활약 중인 필자가 작품 뒤에 가려진 뒷이야기들을 찾아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 한다.
이 기사는 2021년 04월 08일 10:0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백성은 땅을 논밭으로 삼는데,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民以土爲田 吏以民爲田) – 정약용의 <목민심서> 중에서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를 온 정약전(설경구 분)과 물고기를 잡으며 사는 서얼 출신 창대(변요한 분)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종의 버디 무비다. 실학과 서학에 심취해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는 꿈꾸는 ‘인싸’와, 임금을 정점을 하는 성리학적 체계 안에서의 변화를 기대하는 ‘아싸’라는 모순적 캐릭터들간의 케미를 잘 그려낸 수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신분, 나이, 경험, 생각이 모두 다른 두 사람간 공감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잔잔하면서 때론 코믹하게 보여주며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주인공들을 절망하고 방황하게 만드는 조선 후기의 엄혹한 사회상 속으로 내던진다. 그것이 점진적인 것이든 급진적인 것이든 사회 체제의 변화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당시 상황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즈음에 이르러서 관객들은 영화를 관통하는 화두가 ‘무리한 세금 징수’로 대변되는 왕정 국가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며, 그 화두가 영화 초반부터 일관되게 제시되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대역죄인의 유배지가 될 정도로 척박하여 주민이 수 백 명 밖에 안 되는 흑산도에서조차 백성들이 세금으로 인해 고통 받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잡아온 배에 아전들이 들이 닥쳐 세금 명목으로 이것 저것들을 가져가자 창대가 “미역을 말려도 세금, 김 말려도 세금”이라며 소리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가거댁(이정은 분)이 죽은 남편의 묘지 근처에 자라는 어린 소나무 뽑으며, “자잘한 것까지 다 세금을 매겨부는데, 어떻게 산다요”라며 푸념을 늘어놓는 장면도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창대가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설정이다. 오히려 성리학의 체계 안에서 집필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지침으로 삼아, 점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인물이 된다. 사회 주류인 양반 계급에 편입할 기회를 잡으면서, 실학은 쓸모가 없고 서학은 급진적이라는 생각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던 대로 양반 신분을 얻은 후 나주목의 관리가 되어 그가 목도하는 현실은 어부였던 자신이 흑산도에서 겪었던 경험보다 더욱 암울한 것이었다. 정해진 양보다 많은 군포와 공물을 무리하게 징수하는 이유가 궁궐의 고관대작들까지 얽히고 설킨 뇌물 상납 체계와 지방의 미관말직들에게는 녹봉조차 지급되지 않는 관리 체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낫을 들고 관아로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던 한 가장이 갑자기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리는 이른바 ‘절양’(絶陽)을 하는 장면까지 눈 앞에서 보게 된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조차 가혹한 세금이 부과되는 부조리에 자해로 항거하는 그 모습은 창대에게는 물론 관객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남긴다. 처음에 언급한 <목민심서>의 구절이 등장하는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런데 그런 영화 속 상황과 그 안에서 괴로워하는 창대의 모습은 묘하게도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과 그 안에서 역시 괴로워하고 있는 시민들과 너무나 닮아 있다. 우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은 기(욕망)를 억제하여 이(본질)를 명백히 하겠다는 주자학의 교리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를 막지 못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면서 결국 ‘이’를 명백하게 하는데 실패한 당시의 상황은 과도한 징벌적 세금을 부과했지만 LH공사 직원들의 투기를 알지도 못하고 부동산 시장도 안정화시키지도 못한 현 상황과 거의 판박이처럼 같아 보인다. 심지어 실망하고 분노한 젊은이들이 결혼, 출산마저 포기하는 모습은, ‘절양’과 끔찍하게 유사하기까지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산어보>는 곱씹어볼수록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작품처럼 보인다. 다만 영화 속 창대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던 정약전의 급진적인 생각에 마침내 동조하게 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번 선거 결과는 ‘이(본질)’는 이제 포기하고 아예 솔직하게 ‘기(욕망)’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는 것이 사실이다.
실학과 서학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정약전이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그 우려는 이 한마디로 정리될 수 있을 듯 하다. “부동산은 참 힘이 세구나!”
영화 <자산어보>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VjF8Z0Kb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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