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미매각 회사채 책임이 정부에 있나? 미매각 P-CBO 발행은 '모럴해저드'의 전형
임정수 기자공개 2012-12-21 11:26:14
이 기사는 2012년 12월 21일 11:2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증권사들이 올들어 대규모로 떠 안은 미매각 회사채를 떨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행진이 멈추고, 회사채 금리가 조금 씩 상승 조짐을 보이자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가는 큰 손해를 볼까봐 몸이 달았다.증권사의 미매각 회사채 문제는 올해 반복적으로 불거졌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시장금리가 크게 하락, 오히려 비싼 값에 미매각 회사채를 팔 수 있는 전화위복이 됐다. 이 때문에 한국은행 총재의 이름을 딴 '김중수 풋(put)'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10월 금리인하 이후 증권사들은 다시 인수북에 미매각 회사채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후 상황이 변했다.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심리가 생기면서 시장 금리가 바닥을 치고 슬금 슬금 올랐다. 한국은행도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뉘앙스의 신호를 계속 보냈다. 김중수 풋을 다시 기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증권사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루 빨리 곳간을 비워야 다시 실적을 쌓을 수 있지만, 인수 북을 비우려면 상당한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다.
증권사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스스로 손을 대지 않고 끌 궁리를 했다. 대규모 손실을 감수하면서 회사채를 팔아버리기에는 안 그래도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버린 증권사에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증권사들은 금융 당국에 의지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매각 회사채를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당국에 읍소만 하자니 명분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내년 회사채 시장 위기론이다. 이대로 가면 A등급 회사채가 내년에 차환 대란에 처할 수 있다는 (근거가 희박한) 위기론을 언론 등에 퍼트려 당국을 움직인다는 전략이다.
일부 언론이 위기론 조장에 나섰고 금융 당국도 반응했다. 당국은 조만 간 미매각 회사채를 묶어(pooling) 프라이머리채권담보부증권(P-CBO)을 발행하는 등의 회사채 시장 지원 패키지를 내놓을 계획이다. 미매각 P-CBO 발행에는 신용보증기금이 보증을 서게 된다. 증권사의 전략이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미매각 회사채를 정부에 의지해 털겠다는 생각은 '도덕적 해이'로 판단된다. 자기 책임 하에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 투자은행(IB) 본연의 일이고 역할이다. 정부를 이용해 미매각 회사채를 털어낸다는 생각은 '손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생각과 다름이 없다.
미매각이 두려웠으면 애초 부터 감내 가능한 수준에서 리스크를 평가하고 적절한 규모로 회사채를 제 가격에 인수했어야 한다. 금리 인하에 베팅(betting) 하듯이 리스크에 대한 경계 없이 무분별하게 회사채를 인수해 놓고 상황이 변해 뒷 처리가 어려워지니 정부에 책임을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보도 미매각 회사채의 리스크를 증권사 대신 떠 안아주는 기관이 아니다.
내년 회사채 차환 위기론도 근거가 희박하다. 최근 회사채 스프레드가 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그 폭이 아직 위기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 이제 겨우 스프레드가 몇 bp 상승했을 뿐이다. 이달에 A등급 회사채 발행이 안된다며 웅진그룹 사태 때문이라는데,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때는 9월이다. 10월과 11월 회사채 발행은 상당히 활발했고 A등급 회사채 발행이 위축되지도 않았다. 왜 12월이 돼서야 웅진그룹 사태가 회사채 시장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A등급 기업들이 부도로 몰릴 것을 걱정할 만큼 회사채 시장이 경색이라면 이들 기업의 금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올랐어야 한다. 그런데 A- 등급의 3년 만기 회사채 민평금리는 아직 4%도 넘지 않았다. A등급 기업들이 4%도 안되는 이자를 못돼 위기라는 게 말이 되나. 일부 건설사와 해운사가 7%~8%에 거래되고 있지만, 이들 업종은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고 재무구조도 엉망인 곳이 많다. 신용등급이 거품이라면 모를까 회사채 시장이 위기라니...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시장논리를 가장 중시해야 하는 증권사들이 나서서 할 것이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가 아닌 것이 위기로 포장돼 과도한 정부의 대책을 유도해 낸다면 증권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회사채 시장을 정말 생각한다면, 중소기업 자금지원용인 P-CBO를 대기업을 위해 동원할 것이 아니라 투자자 저변을 넓힌다거나 위험(Risk)과 수익(Return)의 적절한 비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 아이디어를 짜내야 할 것이다.
신용등급이 좀 낮으면 진입조차 안되는 시장이 아니라, 금리를 높여 주면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증권사나 정책당국자가 고민할 일이다. 인수실적을 올리기 위해 미매각 회사채를 잔뜩 떠안았으면, 이후 금리 상승에 따른 손실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게 시장의 질서다. IB시장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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