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03월 27일 07:4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0여년 전 산업부로 처음 발령이 났을 때 담당했던 출입처는 중공업 분야였다. 가장 출장이 잦았던 출입처 중 하나가 두산그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내 창원 기계 공장을 비롯해 두산중공업의 베트남 생산법인인 두산비나, 두산인프라코어의 굴삭기와 휠로더 공장인 DICC, DISD 등 국내외 생산기지를 둘러봤던 기억이 있다.당시 두산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움츠리던 시절이었지만 두산만큼은 달랐다. 당시에도 유동성 위기 등이 언급됐지만 자신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산은 국내를 넘어 '글로벌' 기업을 꿈꿨다. 맥주회사(오비맥주)로 기억되던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 2005년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중공업그룹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초점은 철저히 글로벌에 맞춰졌다. 2006년 보일러 설계와 엔지니어링 기술을 보유한 영국의 두산밥콕, 루마니아의 최대 주단조 업체인 IMGB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원천기술 경쟁력을 확보했다. 2007년 미국 밥캣(현 DII), 2009년 체코 스코다 파워를 숨돌릴 새 없이 인수했다. 그 결과 2000년 3조4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10년이 흐른 2010년 23조원까지 성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가 두산그룹의 전성기가 아니었나싶다.
공격적인 해외 M&A가 '승자의 저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정작 두산의 발목을 잡은 건 두산건설이었다. 부진에 빠진 두산건설을 살리기 위해 2010년 전후부터 2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쏟아부었다. 이 과정에서 두산인프라코어는 시장 경쟁력이 있는 공작기계 사업부를 매각했고, 두산중공업은 두산엔진과 두산밥캣의 지분을 팔았다. 건설을 버려야 그룹이 산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두산은 건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10여 년간 건설이 두산그룹의 '계륵'이었다면 최근엔 탈석탄·탈원전 정책 영향으로 두산중공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두산중공업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라는 점에서 두산건설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두산중공업의 기업규모와 지배구조를 감안하면 두산중공업의 위기는 직접적인 두산그룹의 위기다.
두산중공업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으로 2017년 한 해에만 1조원 이상의 손실을 냈다. 신한울 3·4호기부터 신규 원전 발주가 끊기면서 두산중공업의 원전 산업도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현재 두산중공업에 떨어진 발등의 불은 차입금으로 인한 유동성 위기다. 올해 갚아야 할 단기차입금이 지난해 말기준 2조3082억원에 달한다. 반면 지난해 영업이익은 877억원으로 2018년 대비 반토막이 났다. 금융비용을 내기에도 부족한 금액이다.
두산중공업이 한국산업은행 및 수출입은행과 1조원 규모의 대출 약정을 맺을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산중공업에게 닥친 위기가 전적으로 오너일가를 비롯한 경영진의 오판이나 실수만으로 자초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책은행의 지원이 일정부분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대출 계약이 성사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지만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 건실했던 두산중공업으로 회귀하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다.
두산그룹 전성기 시절에 개봉했던 '호우시절(好雨時節)'이란 영화가 있다. 두산그룹 계열사가 제작 지원에 나섰던 영화다. 영화 제목은 두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때를 맞춰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다. 국책은행의 지원은 두산그룹에 호우시절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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