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6년 03월 03일 08:3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피엔에프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지 9개월이 흐른 지난해 겨울. 종로 인근 소박한 고깃집에서 만난 김충기 대표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업 후 숨 가쁘게 성장시켜온 회사가 존망의 기로에 다다랐을 때 오너 경영자로서 짊어져야 하는 등짐의 무게가 가볍지 않아 보였다.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김 대표가 꺼냈던 얘기 대부분은 '신뢰'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대출채권과 기업어음, 전환사채 등을 쥐고 있는 수많은 채권자와 기관·개인 주주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마음에 상당히 자책하고 있었다. 당시 회사가 밟았던 기업회생 인가 전 인수합병(M&A) 절차는 사실상 다른 주인 찾기이지만 그가 밤을 세우며 헌신했던 건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한해 한국 경제에서 쓰러져가는 중소기업의 수가 적지 않다. 이들 기업의 오너 중 상당수가 금융시스템의 비정함을 토로한다. 실패를 냉정히 받아들이기보다 타이밍을 탓할 때가 많다. 몇몇은 회사가 무너지려는 위기를 전후해 자금을 전용하는 어긋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지난달 초만 해도 피엔에프의 기업회생절차는 법원의 관여 아래 진행된 M&A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엔데버 컨소시엄의 인수가 유력했다. 하지만 며칠 전 채권단협의회는 시장의 예상을 뒤엎는 돌발 결정을 내렸다. 김 대표를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 M&A로 새주인을 찾는 회생계획안을 부결했고, 기존 경영진 체제에 힘을 싣는 새로운 회생계획안을 통과시켰다.
매각 가격이 못마땅했거나 엔데버측의 자금 사정이 불안했을 수 있다. '전자펜' '전자칠판' 등 핵심 제품으로 승부를 내려면 현 경영진이 회사를 이끄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벼랑 끝에서도 전심을 다했던 김충기 대표가 이번 결정의 전제였던 건 분명해 보인다.
이제 김 대표는 피엔에프의 소수지분만 보유하게 되겠지만 그에게 실린 신뢰의 무게는 이전보다 무거워졌다. 출자전환이 이뤄지면 그의 지분율은 단숨에 5%로 떨어진다. 그렇지만 채권단은 창업자 김 대표의 '5%' 오너십이 최대주주가 될 M&A 원매자의 주인의식보다 무거울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고백하건대 4개월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김 대표의 신뢰에 대한 얘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를 믿어준 이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던 마음 그대로 피엔에프를 재건하는 모습을 보며 그 날 꺼내놨던 속내가 진심이었음을 다시 확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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