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04월 24일 15:4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서울의 경희궁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초현대식 건물이 있다. 아산정책연구원(The Asan 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이다. 아산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이다.연구원의 홈페이지가 말하듯이 아산은 “한국의 현대화와 남북한 평화 교류의 고비마다 족적을 남긴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별”이었다. 정몽준 명예이사장은 아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의 국력과 위상에 걸맞은 국제적 싱크탱크를 건립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2008년 2월 11일에 아산정책연구원을 설립했다. 아산의 정신과 정 명예이사장의 활동 분야가 조합된 기관이다. 정 명예이사장은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외교안보와 국제관계 분야에 무게를 두었다. 연구원의 이사장은 한승주 전 외교부장관이다.
국내 최대의 민간 싱크탱크
아산정책연구원의 설립목적은 “한반도, 동아시아, 그리고 지구촌의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올바른 사회담론을 주도하는 독립 싱크탱크”가 되는 것이다. 특히 ”통일-외교-안보, 거버넌스, 공공정책-철학 등의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여 우리가 직면한 대내외 도전에 대한 해법을 모색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및 번영을 위한 여건 조성에 노력하고“ 나아가 ”공공외교와 유관분야 전문가를 육성해 우리의 미래를 보다 능동적으로 개척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데 이바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안보, 외교정책, 지역연구, 여론과 국내 정치, 사회과학 방법론, 글로벌 거버넌스 등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실적을 내고 있는데 아태지역 외교안보 이슈에 대해 아시아의 시각과 목소리를 세계에 소개하는 외교안보정책전문 영문저널 ‘The Asan Forum’을 발간한다. 2011년부터 매년 ‘아산플레넘’(Asan Plenum: Connecting Insights)이라는 대형 국제포럼도 개최한다. 거의 600명에 가까운 학자, 전문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 의견을 교환한다. 2019년 주제는 ‘한국의 선택’(Korea’s Choice)이었다.
연구원의 국제자문위원단에는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폴 월포위츠, 브루킹스연구소 소장을 지낸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정 명예이사장은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대담집을 펴냈는데 여기 등장하는 10인의 인물도 대개 국제자문위원들이다. 이 책에는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도널드 럼스펠드, 에드윈 퓰너(Edwin Feulner) 등 인사들과의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책의 서문에 기 소르망과의 대화에서 기 소르망이 “우리는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당신을 존경하게끔 만들 수는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정 명예이사장의 전언이 특히 눈길을 끈다.
헨리 키신저와의 교류
키신저(96)는 2010년 3월에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개최된 초청강연에서 북핵 문제에 대해 강연한 적이 있다. 정 명예이사장은 특히 키신저와 자주 만나고 소통한다. 2009년 초에 키신저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했는데 알팔파클럽(Alfalfa Club)에서 오바마 당시 대통령당선인과도 만났다. 알팔파클럽은 1913년에 결성된 미국 정계와 재계 유력인사 약 200인의 모임으로 현 회장은 칼라일그룹 창업자 루벤스타인이다. 매년 1월 마지막 토요일에 모이고 전현직 대통령을 자주 초청해서 연설을 듣는다.
2012년 3월에는 서울에서, 2014년 8월에는 코네티컷의 키신저 자택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있었고 키신저는 정 명예이사장과 존스홉킨스대 동창으로 교분이 깊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2002~2013)을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 초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블룸버그는 자신의 뉴욕시장 경험을 이야기했고 글로벌 경제에 대한 대화도 오갔다고 한다(Forbes, 2014.4.30.). 가장 최근에는 2019년 11월 뉴욕에서 정 명예이사장과 키신저 박사의 회동이 이루어져 미중관계와 북핵 문제에 대한 의견이 교환되었다.
정몽준-키신저 교류는 1985년 7월에 아산이 전경련 회장으로서 서울에서 키신저를 만났던 인연의 계속이다. 당시 키신저는 국무장관직(1973~1977)을 마치고 사인의 자격으로 덩샤오핑(1904~1997)을 만나기 위해 중국 방문길에 오른 참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수교(1992년)하기 전 상태에서 덩샤오핑의 중국 현대화 정책과 관련한 중국에서의 동향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중국의 미래에 대한 아산과 키신저의 대화 한 대목이 인상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박정웅, 이봐, 해봤어?, 122~123).
키신저: “.. 앞으로 3년만 더 현대화 정책이 지속된다면 중국 공산주의는 결국 하나의 관념으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만 시장경제체제로 간다면 그동안 공산주의 체제에 익숙했던 의식구조와 관행이라는 타성과 소득격차 확대에 의한 계층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야기되어 좌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 파장은 중국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파장이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경제계도 이런 점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주영: “키신저 박사님 제 견해는 다릅니다. 나는 미국 사람들이 중국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미국이 태동도 하기 수천 년 전부터 정치와 외교, 특히 장사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경험과 수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과 반세기 정도 공산주의 체제 속에 살았다고 해서 이들 피 속에 뿌리 깊이 수천 년 내려 내려온 최고의 장사꾼 기질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과정에 다소 혼란과 차질은 겪게 되겠지만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이 대화만으로 본다면 세계 최고의 중국전문가이자 학자인 키신저보다 아산이 중국의 앞날을 더 잘 내다본 셈이다. 당시만 해도 키신저는 중국의 미래를 반신반의했지만 아산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헤리티지재단과의 인연
미국 싱크탱크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활동 중인 대다수 싱크탱크는 20세기에 만들어졌다. 1910년 설립된 카네기평화재단이 있고 1916년에 브루킹스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랜드연구소는 1948년이다. 1973년에는 보수성향의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출범해서 진보성향의 브루킹스와 양대 싱크탱크로 불린다. 헤리티지는 레이건행정부와 함께 크게 발전했다. 그 외, 부시행정부 때 네오콘들의 산실이었던 미국기업연구소(AEI)가 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헤리티지와 컬러가 유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저명한 지한파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설립자는 아산과 교분이 깊었다. 퓰러는 아산정책연구원 국제자문단에 이름이 올라있을뿐 아니라 실질적인 교류를 유지하고 있다. 아산플레넘에도 첫해부터 거의 매년 빠짐없이 참가한다.
아산은 헤리티지재단을 지원했었다. 헤리티지에는 1994년에 ‘정주영 컨퍼런스룸’이 설치되었는데 이듬해인 1995년부터 정기 강연 프로그램이 운영되었고 첫 강연자가 키신저였다. 1999년 헤리티지에서는 ‘정주영 펠로십’이 론칭되었다. 초대 정주영 펠로는 와이오밍 주 출신 말콤 월롭(Malcolm Wallop, 1933~2011) 공화당 상원의원(3선)이었다.
퓰너는 2015년에 중앙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도 세계적 싱크탱크의 탄생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아산정책연구원을 보자. 저명한 석학과 우수 인력을 다수 거느리며 글로벌 임팩트가 있는 어젠다와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10년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한국에서 가능해졌다. 싱크탱크는 아이디어가 갖는 힘을 나누고, 공유하며, 확산시켜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지적 활동이 경제성장 못지 않게 중요시된다.” (월간중앙, 2015년 11호)
미국 보수정권의 대외정책은 미국은 국제사회를 규정짓는 전통적 요인들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미국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는 안보관을 핵심으로 한다. 레이건행정부가 이를 상징한다. 부시의 ‘신세계질서’도 그 연장이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제국주의를 혐오하지만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평화보다 정의를 우선하는 사람이 많고 이 생각이 대외관계와 무력사용 결정에 영향을 미쳐왔다.
필자는 국내 언론인들이 퓰너와 약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퓰너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보수정권이 보호주의를 표방해 경제와 통상에 타격을 줄지는 몰라도 북핵과 남북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퓰너와 같은 정통파 보수이론가들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중요한 외교자산인 한미동맹의 전략적 의미와 가치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아산정책연구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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