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의 Money-Flix]'슬기로운 원격 의료의 세계'는 누구를 위해 필요한가<슬기로운 의사생활>과 <부부의 세계>를 통해 본 원격 의료 혹은 의료 민영화 논란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공개 2020-06-04 08:15:28
[편집자주]
많은 영화와 TV 드라마들이 금융과 투자를 소재로 다룬다. 하지만 그 배경과 함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참인 명제다. 머니플릭스(Money-Flix)는 전략 컨설팅 업계를 거쳐 현재 사모투자업계에서 맹활약 중인 필자가 작품 뒤에 가려진 뒷이야기들을 찾아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 한다.
이 기사는 2020년 06월 04일 06:4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이어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방송국과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들은 큰 수혜를 얻었다. 그 중에서도 <부부의 세계>(이하 <부세>)로 비지상파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한 JTBC가 가장 큰 승자였고,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을 방영한 TVN과 이를 스트리밍한 넷플릭스도 그에 못지 않은 수혜자로 등극했다.전염병이 창궐하고 K-방역이 세계적인 주목을 끄는 시점에 가장 큰 화제가 된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모두 의사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다만 <부세>의 지선우(김희애 분)의 경우 서울에서 의대를 나왔지만 남편 고향인 지방도시의 중형 병원에서 일하는 반면, <슬의생>의 주인공들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형 병원인 율제병원에서 일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부원장인 지선우는 이런저런 행정 업무까지 처리해야 하긴 하지만, 누가 봐도 여유로운 업무 환경 하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율제병원 신경외과 부교수인 채송화(전미도 분)는 가끔 합주 연습을 하거나 혼자 캠핑 가는 것 빼고는, 24시간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도무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심신이 지친 시청자들이 그렇게 조금 다른 환경에 놓인 의사들의 이야기를 즐기는 동안 드라마 밖에서는 의료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화두가 다시 한번 논란이 됐다. 코로나19의 감염 가능성으로 인해 원격 의료 행위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자, 이를 계기로 아예 본격적인 원격 의료 허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기본적인 논리는 이렇다. 경증 만성 질환자, 노인 그리고 건강취약계층 등의 경우 비대면 시스템을 통해 진료와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의 주기적인 확산 가능성이 높으므로, 환자와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더욱 이런 원격 의료 서비스의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국, 중국, 일본 등 많은 국가에서 이런 원격 진료가 이미 허용돼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강력한 논거로 제시된다. 장기적으로 K-방역으로 위상이 높아진 한국의 의료 산업이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해외 시장으로의 진출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항상 함께 언급된다.
하지만 반대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결국 원격 의료를 위한 비대면 시스템 구축은 몇몇 대형 병원과 대기업들의 전유물이 될 것이고, 이는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인, 소형, 지방 병원들이 고사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규모 투자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료 민영화까지 허용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토 면적이 작고 인구 밀도가 높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격 의료가 아니라 의대 증설 및 공공 의료의 확대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고의 인재들이 의대에 몰리고 있지만, 정작 의대 정원은 수 십 년간 동결인 상태가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거기에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축소돼 온 지방의 공공의료 체계도 이참에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생각해보면 지방에 더 많은 의대 개설을 허용할 경우, 지방대학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설 것은 불 보듯 명확하다. 그리고 그 의대 졸업생들은 경쟁이 심한 수도권이 아닌 해당 지역에서 개인, 소형, 공공 병원에 진출하여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원격 의료에 반대하는 대한의사협회 등이 이러한 대안에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들을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된다. 원격 의료를 도입할 경우 <슬의생>의 채 교수는 더 많이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합주 연습이나 캠핑은 꿈조차 못 꾸게 된다. 그렇게 채 교수가 쏟아 부은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은 궁극적으로는 민영화된 대형 병원이나 원격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불려주는 역할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부세>의 지 부원장은 지방 도시의 환자들을 서울 대형병원의 원격 의료 서비스에 빼앗겨 대도시 대형 병원에 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원격 의료를 반대하는 지 부원장이지만, 장기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의대 정원의 확대도 반대한다. 지금의 여유로운 의사생활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결국은 자본의 논리와 기득권의 논리가 충돌하고 있는 상황인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논란 속에 매우 중요한 어느 이해당사자의 입장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해당사자란 바로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자’다. 드라마 <부세>와 <슬의생>의 주인공이 환자가 아니라 의사들인 것과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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