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1년 02월 01일 08: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 이전에는 직업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하는 일을 거들다 보면 기능이 습득되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요즘도 창업이 힘든 일인데 옛날에는 가족이 쌓아놓은 사업 기반이 있으면 그를 물려받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가족기업이 탄생한 이유다.이탈리아 무기제조회사 베레타(Fabbrica D’Armi Pietro Beretta)의 역사는 15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26년은 유럽에서는 헝가리왕국이 창건된 해이고 한반도는 연산군을 이은 조선 11대 중종 때다. 로마제국 때부터 철광산 지역이던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브레시아 지역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무기제조업의 중심이 된다. 베레타는 이 지역에서 1500년 무렵부터 대장간을 하다가 총신과 포신을 제작하는 기업이 되었다. 요즘의 방위산업체다.
창업 후 베레타는 이탈리아 각지의 군대를 무장시키는 기업으로 존속하다가 1943년에 독일군이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몰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에 납품했다. 전후에는 미군이 사용하는 소총의 개량에도 참여하면서 이탈리아군과 경찰에 무기를 공급했다. 1980년대에는 미군에 베스트셀러 권총(Beretta M9)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와 멜 깁슨의 ‘리설웨폰’도 베레타를 썼고 제임스 본드도 월터PPK로 바꾸기 전까지 베레타를 썼다.
베레타의 기원을 1526년으로 보는 이유는 역사적 기록 때문이다. 장인 바르톨로메오 베레타가 베네치아 무기창에 화승총 총신 185개를 납품하고 296두캇을 수령했다는 그해 10월 3일 자 문서가 남아있다. 베네치아 무기창은 베네치아공화국 때 만들어져 선박을 건조하고 기타 해양 장구를 제작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산업혁명 이전 유럽에서 가장 큰 산업시설이었는데 해양강자 베네치아의 파워가 여기서 나왔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베네치아 무기창에서 열리고 베레타 패밀리는 그 이벤트의 후원자다.
베레타에서는 15대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졌다. 피에트로 베레타가 CEO다. 14대 우고를 승계했다. 부사장인 동생 프랑코와 함께 회사를 이끈다. 16대 승계후보자도 정해져 있는데 프랑코의 아들 뉴욕 태생 카를로(24)다.
베레타 보다 더 유서 깊은 이탈리아 회사로 종 제조사 마리넬리(Fonderia Pontificia Marinelli)가 있다. 1000년 또는 최소한 1339년(고려 충숙왕 때)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회사는 남부 이탈리아 아요네에 있다. 아요네는 14세기에 나폴리왕국 소속이었다. 1924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황청 문장이 새겨진 종을 제작하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이탈리아 성당에 설치되는 종은 90%가 마리넬리 제품이다. 마리넬리 형제(Armando와 Pasquale)가 소유하고 경영한다.
마리넬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이다. 가장 오래된 세계 3대 가족기업에도 들어간다. 705년에 시작된 게이운칸과 718년에 시작해서 46대가 경영하는 호시료칸이 일본기업이므로 마리넬리는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업체이기도 하다. 시대를 초월하고 기능이 단순한 물건인 종을 제작한다는 점도 그 오랜 역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종의 제작이라는 특이하고 한정되고 단순한 사업을 지금 경영자들의 자녀가 이어받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어떤 기업이 500년, 1000년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왕조, 국가, 정권, 전쟁, 역병, 자연재해, 경제위기, 인간의 생활양식과 소비자 수요, 취향 변화 등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환경에 적응했다는 의미도 되고 경쟁기업들의 틈새에서 생존해 나왔다는 의미다. 가족의 전통과 결속력, 집중력 외에 다른 동인을 찾기 어렵다. 물론 무수히 많은 가족기업들이 역사에서 탄생하고 사라졌다. 7대 이상 승계된 가족기업의 수가 전세계에 100개 정도밖에 없다는 자료도 있다. 이들 중에는 사업 내용이 예전과 전혀 달라진 기업들도 많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뛰어난 적응력이 장수의 비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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