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2년 06월 14일 07:4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우연히 접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은 꽤나 흡입력이 강한 에세이였다. 사실 하루키가 워낙 여행과 술 애호가로 알려진 터라 내용이야 빤했지만 언어를 위스키에 비유한다는 흥미로운 발상이 금새 몰입감으로 번졌다.만약 인수합병(M&A) 시장을 맛에 비유한다면 비딩에서 이긴 승리의 기쁨은 '달콤함'이 제격이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승리의 달콤함은 배가 된다. 반대로 패배의 기분엔 씁쓸하거나 떫떠름한 맛이 어울린다. 하지만 가끔 승자도 달콤씁쓸하거나 혹은 떫떠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승자의 저주'로 불리는 상황이다.
상반기 M&A 시장 최대어 PI첨단소재 인수전이 마무리됐다. 경영권은 무려 1조2750억원에 베어링프라이빗에쿼티아시아(PEA)로 넘어갔다. 베어링PEA는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사모투자펀드(PEF) 운용사지만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누적 자산 운용 규모(AUM)가 약 24조원(177억 유로)에 이른다.
1997년 설립돼 범아시아권 기업 약 47곳에 투자했다. 투자 범위도 로봇(호리즌로보틱스)·ICT(SAI글로벌)·헬스케어(루메니스·씨트러스테크) 등으로 광범위하다. 한국에선 로젠택배, 교보생명, 신한금융투자 등을 담았다. 더 과거엔 아큐온캐피탈이나 한라시멘트 등에 투자했다가 엑시트한 사례도 있다. 최근 유럽 최대 PEF 운용사 EQT파트너스(EQT)에 인수되면서 든든한 뒷배도 마련했다.
글로벌 위상이나 자금력, 운용 역량면에서 압도적인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번 딜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시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베어링PEA가 인수전을 승리로 이끈 덴 파격적 고용안정 조건이 한몫했다고 전해진다. 근로자 입장에서야 환호할 소식이지만 고용주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다. 인건비는 대표적인 고정비로, 경영악화 국면 속 자본금을 무섭게 빼내는 존재로 둔갑한다.
유사 매물이 쏟아지며 동박제조 산업 판도도 재편되고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원래 PI첨단소재 원매자였다가 매물로 탈바꿈했다. 넥스플렉스도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인수하지 못할 거면 인수돼야 살아남는단 판단이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결정의 요지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의장은 그동안 말레이시아, 유럽 등에 투자해 세계적 기업을 일궜지만 올해 매출이 최고점을 향해가고 있다고 봤다"며 "경쟁사들이 새 투자자를 찾으면 본인 역량만으로 이를 더 키우기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PI첨단소재는 직전일 장마감 기준 52주 최저가를 기록했다. 어수선한 자본시장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반응이 꽤나 싸늘하다. 물론 자금력이 뛰어난 글로벌 PE로선 추가 매입을 위한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승리의 달콤함이 달콤씁쓸한 맛으로 변하지 않는 일은 전적으로 새 경영진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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