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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주 수요예측과 '라쇼몽' [thebell note]

안준호 기자공개 2023-02-15 07:40:01

이 기사는 2023년 02월 13일 07:5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네 번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다. 아내와 길을 나선 무사가 도적을 만나 결투 끝에 살해당한다. 벌어진 일은 하나지만 무사, 부인, 도적, 목격자의 이야기가 저마다 다르다. 서술 기법이 인상적이다 보니 '라쇼몽 효과'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관점에 따라 현상에 대한 해석이 다를 때, 그래서 객관적 진실을 찾기 어려울 때 주로 인용된다.

객관성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에서도 알맹이다. 주식시장에서 '객관성'이란 대개 시장 가격을 의미한다. 일정 규모의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적정 가격이 발견된다는 믿음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종종 가격에 대한 관점 차이가 발생한다. 정규 시장에서 아직 거래되지 않는 주식의 가격, 비상장 기업의 가치를 논할 때다. 창업자, 벤처캐피탈(VC), 투자자의 입장이 다르기에 간혹 시비도 벌어진다.

게임 개발사 크래프톤은 대표적인 사례다. 크래프톤은 월트 디즈니, 워너 뮤직 그룹 등 해외 기업을 근거로 기업가치를 계산했다. 콘텐츠라는 공통점만으로 상이한 업종을 포함시키는 선택이 적절하냐는 비판이 뒤따랐다. 국내 최초로 글로벌 시장에서 히트한 역량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공존했다. 금융당국의 개입으로 비교 기업은 바뀌었으나 여전히 비싸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비상장 기업의 가격을 발견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비 심사를 거치고, 증권신고서를 제출하고, 몇 주의 기간을 들여 설명회를 진행한다. 최종적으로 수요예측 제도를 통해 공모가를 확정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적정 가격이 형성되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밸류에이션을 책임지는 주관사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 전 만난 증권사 기업공개(IPO) 담당 임원에게 지난 몇 년 사이 있었던 공모주 호황기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적정 가격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한 기업이 '따상'을 이어가니, 밸류에이션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반대로 최근에는 발행사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 주관사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금융당국이 뒤늦게나마 제도 개선 작업에 나선 것은 그래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수요예측 기간은 늘리고, 상장 당일 가격 변동 폭을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현재 계획을 그대로 실현하기엔 보완할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증권사의 자율성엔 제한을 둔 채 지나친 책임을 지운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무자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은 네 번의 이야기를 반복해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낸다. 수요예측 제도 손질에 나선 금융당국도 라쇼몽에서 그려지는 인내심을 본받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청취하고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좀 더 고민했으면 한다. 서로 다른 입장들 속에서 합의점을 찾으려면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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