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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블랙 코미디'와 남겨진 이들 [thebell note]

이장준 기자공개 2023-04-17 11:13:09

이 기사는 2023년 04월 12일 07:4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지난달 말 아침 일찍 주주총회가 열리는 KT 연구개발센터를 찾았다. 개회 30분 전 도착했지만 행사가 진행되는 2층 강당은 이미 만석이라 TV로 현장을 중계하는 1층에 자리를 잡았다. 주주들은 이날 선임할 예정이었던 이사진이 줄줄이 사퇴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박종욱 경영기획부문장 사장(대표이사 직무대행)이 연단에 올라 지난 4개월간 수차례 CEO 선임이 무산된 촌극에 대해 거듭 사과했다. "비 온 뒤 땅 굳어진다"며 수습 의지를 드러냈지만 분노한 주주들의 고성이 마이크 소리를 뚫고 이어졌다. 행사가 진행된 40여 분 내내 무너진 지배구조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성토가 쏟아졌다.

구현모 전 대표 체제에서 KT는 역대 최대 매출을 경신하고 9년여 만에 시가총액 10조원을 넘어섰다. 성장이 둔화한 통신업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 기업(디지코)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실제 성과로 입증해 민영화 이후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외풍에 리더십이 망가지며 지난 영광은 빛이 바랬다. 주가는 2년 전으로 돌아갔고 올 1분기에는 통신 3사 중 유일하게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지배구조를 흔든 책임을 따지자면 분노의 화살은 용산이나 여의도를 향하는 게 마땅해 보인다. '주인 없는 회사'를 손봐야겠다며 사상 초유의 경영공백 사태를 부른 점을 부인할 순 없다.

다만 KT의 변화에 대한 주주들의 믿음이 워낙 컸기에 경영진 사퇴에 따른 배신감도 그에 못지않았다. 외부에서 아무리 흔들어도 소액주주들은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 윤경림 후보자를 차기 CEO로 지지했다. 좋은 성과를 거두고 공개경쟁을 통해 발탁된 인사가 부당한 압박에 물러나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으니 버텨주길 응원했다.

이들의 바람이 무색하게 KT 이사진은 사실상 해체됐다. 구 전 대표 연임 실패 이후 일련의 행보는 KT라 쓰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라 읽는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였다. 아수라장이 된 주총과 여전히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기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했다.

연극은 일단락됐지만 2만여 명의 KT 구성원은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아무리 잘해도 대외 변수에 언제든 회사가 멈출 수 있다는 무력감을 안고 근무할 뿐이다. 지분을 보유한 어엿한 '주인'임에도 말이다. 아직도 민간기업 CEO 자리를 전리품처럼 여기고 근간을 흔든 정치권과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다 결국엔 떠난 이사진. 그로 인한 피해와 수습은 오롯이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그렇기에 새로 꾸릴 지배구조가 중요하다. KT가 독립적이고 투명한 지배구조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어떤 혁신도 '길어야 5년'에 그칠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시스템을 갖춰야 상흔이 깊은 임직원을 위로하고 주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주인공만 바뀐 블랙 코미디를 다시 보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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