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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에 무뎌진 위법 [thebell note]

윤기쁨 기자공개 2023-06-27 08:17:54

이 기사는 2023년 06월 22일 08:3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채권 파킹은 랩어카운트를 운용하는 증권사들에는 신뢰에 기반한 일종의 암묵적 비즈니스 모델이다. 한 증권사가 고객 자금(채권)을 다른 증권사에 일정 기간 맡기고(파킹) 돌려 받을 때는 처음 맡겼을 당시와 같은 가격에 되찾는다.

이는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시장이다. 대내외 금융환경과 상관없이 파킹 기간 동안 동일한 금리를 유지해야하고 계약서 없는 구두 합의가 가능해야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증권사들은 원활하게 자금을 유치하고 투자자는 시중 금리보다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모두에게 이로운 사업 구조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위법이라는 점이다. 자본시장법상 다수 증권사가 자전거래를 담합한 행위인 통정매매(연계 자전거래)에 해당한다. 채권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회계처리가 발생하고 시장가격을 교란시킨다. 2013년, 2017년 실제 다수의 증권사들이 통정매매·파킹 혐의로 무더기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후 금융감독원은 불법 행위를 엄단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경각심을 가질 만도 하지만 증권사들은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더욱 대담해졌다. 수법은 교묘해졌고 연대는 단단해졌다. 파킹을 여러 증권사에 나눠 하거나 한 달에 걸쳐 진행해 금융 조사 당국이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식이다. ‘모두가 관행적으로 해왔으니 괜찮다’며 위법에 대한 죄책감은 점차 무뎌져 갔다. 결국 수년 만에 같은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며 최근 또다시 공론화됐다.

금감원은 이번에도 강력한 수사 방침을 밝히며 전수 조사에 들어갔다. 늘 그랬듯이 일부 증권사에게 경고 등의 제재를 내리는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모호한 제도와 빈약한 법리적 구조로 연계 자전거래를 증명해내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관행으로 넘기기에는 상황이 나쁘다. 저금리일 때에는 높은 채권가격으로 비즈니스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상황은 급변했다. 지난해 급격한 금리 상승으로 채권가격이 급락하면서 랩어카운트를 운용하는 증권사들은 엄청난 평가손실을 입었다. 이제 파킹을 해준 증권사와 이를 다시 매수해야하는 증권사들 간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된다.

현재 약 20조원 정도가 채권 파킹에 활용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랩어카운트 만기 시기가 돌아오면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환매 중단이 속출하고 증권사 간 소송은 물론 손해배상 규모는 채권시장을 흔들 수 있다. 당사자들의 도덕성이나 자정능력, 금감원의 으름장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 당국은 단순히 위법 측면에서 바라볼 게 아니라 자본시장 건전성을 위해 시스템 재구축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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