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7월 18일 07:5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눈을 밟으며 들판을 걸어 갈 때는(踏雪野中去)/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말라(不須胡亂行)/오늘 내가 남겨 놓은 발자국은(今日我行跡)/후에 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서산대사가 짓고 백범 김구 선생이 삶의 신조로 삼았다는 '답설(踏雪)' 전문이다. 선구자의 외로움과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시조다. OLED 공정 장비 제조사 필옵틱스의 지난 1년의 행보를 반추해보면 이정표가 없는 길을 걷는 자의 고뇌가 헤아려진다.
필옵틱스는 최근 2차전지 부문 자회사 필에너지를 코스닥 시장에 안착시켰다. 필에너지는 공모과정에서 기관 투심을 사로잡으며 경쟁률 1318대 1, 증거금 15조7578억원을 기록, 올해 코스닥 최대어로 자리매김했다. 상장 직후 공모가 대비 300% 가까이 주가가 뛰며 첫 '따따블(400%)' 달성의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다.
필에너지가 올 여름 증시의 블록버스터로 데뷔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물론 내재가치와 잠재력에 있다. 레이저 공정 기술을 기반으로 스태킹, 노칭 설비를 생산하는 필에너지는 물적분할 직후 삼성SDI의 지분투자(20%)를 유치하면서 일종의 '보증'을 획득했다. 삼성SDI의 글로벌 전략에 따라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지난해에만 2000억원 가까운 매출액을 올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회사 물적분할 이후 IPO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필옵틱스의 전략적 인내와 결단이 결과적으로 공모를 성공의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LG화학에서 물적분할한 LG에너지솔루션의 선례 때문에 당초 필옵틱스 주주들의 여론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여기에 금감원, 거래소가 물적분할 자회사 상장시 강도 높은 주주환원책을 요구한 것도 필옵틱스에게는 중과부적 상황이었다.
필옵틱스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 덮인 들판에 발자국을 새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상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황에서 주주들과 시장의 여론을 수차례 취합하면서 족적을 만들어 갔다. 현금배당, 현물배당(신주), 자사주 소각 등 환원액은 처음 160억원 규모에서 의견 수렴을 거치며 300억원 가까이 불어났다. 필에너지 주가 6만원을 기준으로 필옵틱스 주주를 대상으로 한 환원액은 340억~35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 물론 대주주 등은 제외된다.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일단 필옵틱스의 정공은 먹힌 듯하다. 비판적 여론이 선회했고 모회사와 자회사 모두 기업가치가 크게 올랐다. 올해 전방 고객사가 대형 OLED 투자를 예고하면서 수익성 개선도 점쳐지고 있다. 모·자 모두가 만족하는 가정이 되고 있다.
필옵틱스가 새긴 족적이 정답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자회사 공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기수 대표 및 김광일 사장, 최용석 상무 등 구성원이 보여준 인내와 유연성은 후에 오는 자들에게 이정표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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