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9월 15일 07:5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늦여름 휴가차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았다. 이곳은 페기 구겐하임이 마지막 생을 보낸 저택을 개조한 미술관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호화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바실리 칸딘스키, 르네 마그리트, 피트 몬드리안, 잭슨 폴록 등 현대 미술 아티스트 걸작이 한데 모여 있다.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렉션이 눈길을 사로잡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깊은 울림을 주는건 대가의 작품을 직접 눈 앞에서 마주한 순간이 아니었다. 시각 장애인이 촉각을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양각으로 작품을 재현해 놓은 배려에 더 큰 감명을 받았다. 점자 안내도는 가끔 본 적 있지만 평평한 면에 이미지를 새겨 시각장애인도 촉각을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미술관은 흔치 않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구겐하임 재단의 ESG 경영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곳은 입장료가 좀 더 비싼 편이다. 관람객은 컬렉션 이름값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안게 되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유무형의 가치는 입장료 그 이상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미술관이 아닌 벤처캐피탈 업계에서다. 모험자본 시장의 투자 마중을 역할을 하는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벤처투자 임직원 명함에 점자가 새겨져 있는 걸 봤을 때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배려다. 점자 명함은 일반 명함보다 제작하는데 비용이 2~3배 더 든다고 한다. 정작 한국벤처투자 명함에 새겨진 점자를 활용할 필요가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폭넓은 의미에서 ESG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벤처투자의 역할 자체가 ESG와 맞닿아 있다. 한국 벤처 투자 시장은 벤처 캐피탈의 원조인 미국과 달리 민간 자금보다는 공적 자금에 기대 성장해왔다. 한국벤처투자는 위탁운용사(GP)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수익률 등 성과와 트랙레코드도 중요하게 본다.
결과적으로는 외부 민간 자금을 끌어오는데 어려움을 겪는 중소형 VC에 생명수 역할을 해왔다. 여타 연기금 출자자(LP)와 달리 소수 운용사에 자금을 몰아주기 보다는 다수 운용사에 자금을 쪼개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모험자본 시장에서 승자독식 현상을 방지하고 중소형 운용사가 대형 하우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왔다.
투자 영역도 수익성만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는 않는다. 2011년부터 운용되고 있는 사회적기업 모태펀드가 대표적이다. 사회서비스 혁신기업에 투자하는 보건복지부,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을 이끄는 사회적기업에 투자하는 고용노동부 등이 출자한 모태펀드가 사회적경제기업을 위한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 벤처 캐피탈 역시 투자 포트폴리오 기업을 고를 때 ESG를 염두에 두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선순환 효과다.
유웅환 한국벤처투자 사장이 제작한 점자 명함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투자 유치 목적에서 방문한 외국계 투자회사 리더가 점자 명함을 보고 ESG 투자에 관심 있는 곳이라며 반가워했다는 후문이다.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돼 네트워크를 쌓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한국벤처투자는 연초 조직개편을 통해 'ESG 경영팀'을 신설했다. 이름 그대로 ESG 경영에 관한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으로 모태펀드 운용을 총괄하는 한국벤처투자가 앞장서 ESG 경영을 도입해 모범을 보이겠다는 취지다. 반신반의 시각도 있었다. 몇 년전부터 기업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ESG 트렌드에 단순 편승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시선이다. 향후 행보를 통해 그 우려를 불식시키는 건 온전히 한국벤처투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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