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기업구조조정 점검]9부 능선에서 멈춰선 빅딜…'과거 방식이 문제?'①아시아나항공·HMM 등 빅딜 난항…90년대 식 구조조정 원칙과 제도에 유연성 가미해야
이재용 기자공개 2023-11-07 07:57:34
[편집자주]
KDB산업은행의 기업구조조정이 난항을 겪고 있다. 수년간 끌어온 굵직한 빅딜들이 실익 없이 공전하고 있다. 원매자와의 눈높이 차이, 시장의 상황 등 다양한 변수가 원인으로 언급된다. 근본적으론 산업의 구조조정 방식이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벨은 산은이 발간한 '기업구조조정 백서'를 토대로 난맥에 빠진 산은 구조조정의 원인을 점검하고 미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본다.
이 기사는 2023년 11월 03일 07:5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기업구조조정 중추로서의 산업은행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아시아나항공과 HMM 등 항공·해운산업의 구조조정은 개별 기업의 정상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조정 결과에 따라 개별 기업은 물론 해운·항공 등 국가 기간 산업군의 미래가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아시아나항공과 HMM의 구조조정은 현재 9부 능선에서 막혀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은 해외 경쟁 당국의 인허가가 늦어지고 있다. HMM의 경우 원매자의 자금 동원 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계약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
구조조정의 지연은 산업은행이 어쩔 수 없는 외생변수이긴 하다. 하지만 산은의 기업구조조정 방식이 과거에 안주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산업은행의 구조조정의 큰 틀은 1990년대 말에 정한 원칙과 제도를 기초로 한다. 30년전에 수립해 정형화된 구조조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구조조정 현장에 유연성을 해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9부 능선에서 공전하는 '빅딜'
최근 진행되는 산업은행 발 해운·항공 빅딜은 수조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9부 능선을 넘지 못한 채 공전하고 있다. 산은은 뾰족한 출구전략 없이 강행만을 고수하고 있다.
HMM 매각전의 경우 하림, 동원, LX그룹을 적격 인수 후보로 선정하고 매각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상 주식은 산은과 해양진흥공사가 보유한 3억9879만주로 IB 업계는 매각가를 5조~6원대로 추정한다. 예상 매각가는 이전 7조원보다 낮아졌지만 유찰 전망은 계속되고 있다. 인수 후보들이 HMM을 인수할 만큼의 현금 동원력이 없다는 평가 때문이다.
외부 자금 등을 끌어와 인수해도 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아시아나그룹처럼 수년 내 HMM을 다시 매물로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후보들의 재무 역량에 의구심과 우려가 이어 지지만 산은은 무리한 강행군을 펼치고 있다. 애초 바랐던 우량 원매자가 참여하지 않았어도 다른 활로를 모색하는 플랜B가 공식적으로 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항공산업 빅딜도 순탄치 못하다. 양사 통합으로 인한 독과점 문제가 걸림돌이 되면서 주요국 경쟁당국의 허들을 넘지 못하고 있다. 특히 EU는 양 사 합병으로 유럽 주요 화물·여객 노선에서 독과점이 우려된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대한항공은 아시아나 화물 사업 매각 등의 내용이 담긴 시정 안을 EU 집행위에 제출하기로 했다.
화물 사업은 아시아나항공의 핵심 경쟁력이다. 화물 부문의 지난해 매출은 3조원으로 전체 5조6300억원의 절반을 넘는다. 항공사의 사업 경쟁력까지 저하시키며 무리하게 합병을 강행할 경우 항공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산은은 예측이 어려운 대내외 변수와 리스크에 대비해 큰 그림을 그려 구조조정 전략을 집행해 왔지만 최근 구조조정은 예견된 문제에도 좌초 위기에 처할 만큼 정교하게 짜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고 말했다.
◇20세기 말 9대 빅딜과 닮은 아시아나항공 구조조정
산은의 최근 구조조정은 1999년에 있었던 '9대 빅딜'과 비슷하다. 과거 산은이 추진했던 구조조정 방식을 답습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기업 및 경제의 규모와 상황이 달라졌지만 구조조정을 이끄는 산은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은은 IMF 외환위기 때 대대적인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업종 전문화를 위한 사업교환(빅딜) 추진'이란 정책을 통해 기업구조조정을 했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을 상대적으로 경쟁 우위에 있는 기업으로 이관하거나, 계열사에서 분리해 별도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산은은 당시 9개 업종을 지정해 부실기업을 경쟁사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빅딜을 추진했다. 9개 업종은 정유·석유화학·반도체·철도차량·항공기·발전설비·선박용 엔진·자동차·가전 등이었다. 대상은 옛 현대그룹, 삼성그룹, 옛 대우그룹, LG그룹 등에 속한 13개 계열사와 한진중공업, 한화에너지, 한국중공업 등 3개 사를 포함한 총 16개 사였다.
1999년의 9대 빅딜은 기업 간 합종연횡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공정거래와 독과점 이슈를 남겼다. 현재의 아시아나항공 딜 등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산은은 대한항공으로의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결정하면서 '항공업 붕괴를 막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세웠고 독과점 논란에 부딪혔다.
◇실무자에 전승된 산은 기업구조조정 해법
20세기 말 방식을 현재도 답습하는 요인은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온 산은의 기업구조조정 틀에 있다. 지난 2014년 산은 기업구조조정부가 발간한 '기업구조조정과 KDB'라는 책은 현재도 기업구조조정 실무자들 사이에서 지침서 역할을 한다.
해당 책자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약 15년간 기업구조조정 부서에서 있었던 구조조정 경험 및 사례를 집대성한 일종의 백서다. 백서를 보면 산은 기업구조조정부는 장기 전략적인 관점에서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경쟁력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전문화해 나가는 과정이 기업구조조정의 핵심이라고 기술했다.
단순히 문제가 발생한 기업을 대상으로 사후적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인원 감축, 경비 절감 등은 단편·단기적 측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원칙과 과제를 기반으로 실무진은 강력한 기업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산은은 기업구조조정의 5대 추진 과제와 3대 추진 원칙을 세웠다.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실무진이 수행해야 하는 5대 추진 과제는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역량 집중 △지배주주 및 경영자 책임성 확립 등이다.
3대 추진 원칙은 △기업 투명성과 국제적 정합성 확보로 경쟁력 제고 △금융기관 주도적인 기업구조조정 추진 △정부의 기업구조조정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이다. 여기에 효율적 추진을 위한 부수 원칙(이해관계자 간 적정한 손실 부담, 워크아웃을 핵심 수단으로 활용)을 더했다. 이 원칙들은 현재도 산은의 구조조정 명분으로 쓰인다.
기업구조조정을 할 때 활용되는 제도 및 방법론도 과거와 큰 변화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은 2001년 제정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에 근거해 구조조정을 진행해 왔다. 기촉법은 워크아웃의 근거가 되는 법이다. 기촉법 제정 이후 산은은 워크아웃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방법론을 완성했다. 크게 재무구조조정, 사업구조조정, 지배구조 개선 및 경영관리 측면으로 나뉜다.
이 방법론은 여전히 산은 내부에서 통용되고 있다. 산은은 재무구조조정을 위해 채권 상환유예, 출자전환, 금리 재조정, 신규 자금 지원, 계열사 간 보증채무 해소, 재무 할인 변제 및 채권 반대매수 청구권 등의 방법을 활용한다. 사업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기업분할, 사업부 매각, 계열사 정리, 부동산 매각, 유가증권 매각, 유상증자 및 대주주 사재 출연, 인력구조조정 등을 진행한다.
산은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자본시장을 통한 구조조정이 활성화되면서 외부 자본 유치를 통한 조기 정상화가 최근의 구조조정 추세"라며 "개별 산업과 기업의 여건, 시장 상황 등 특성에 맞춰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대우조선해양, 쌍용자동차, 두산그룹 등의 경영정상화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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