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08월 13일 14:1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지정학이 경제와 금융에 큰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기업경영도 지정학적 상황과 예측을 변수로 넣어야 하는 시대다. 그러면 이른바 신지정학 시대가 기업의 지배구조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세계 각국 기업들의 지배구조는 향후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리스크관리와 보험 관련 컨설팅 펌인 WTW에 따르면 지정학 리스크는 천재지변 리스크에 비견된다.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한 번 발생하면 사업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파를 일으킨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세계의 무수히 많은 기업이 러시아 사업을 접거나 재편한 데서 잘 볼 수 있다.
WTW 조사에 따르면 최근에 글로벌 대기업의 90%가 지정학을 포함한 정치적 리스크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수치는 35%를 넘지 않았다. 특히 유럽 기업들이 입은 타격이 커서 86%의 기업들이 재무적 손실을 입었다. 미국 기업들의 경우는 33%였다. 정치적 리스크에 대비해 보험상품을 구입하는 기업들의 비중은 2019년에 25%였는데 2023년에는 68%로 증가했다. 미국 DTCC에 따르면 81%의 미국 대기업들이 지정학 리스크를 2024년의 가장 큰 사업 리스크로 꼽았다. 2013년에는 68%였다.
인류 역사의 전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글로벌 공급망이 완성되고 가동되었던 최근의 ‘글로벌 시대’가 아주 짧은 예외였는데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특히 국제 무대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질 수가 없을 것이다. 스탠퍼드대 밀홉트 교수는 지금까지의 글로벌 경제를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에 비유한다. 이제 인류의 역사는 꿈을 깨고 냉혹한 현실로 돌아갈 차례다. 밀홉트 교수가 예견하는 두 가지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의 증권법이 보편성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방향을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미국 시장에 상장하는 외국 기업들에게는 상당한 재량이 주어져서 각 기업 본국의 제도에 따르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그 추세가 변할 수 있다. 미국 증권시장의 포용성도 재평가될 것이다. 무수히 많은 중국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 상장해서 자금을 조달해 왔는데 미국의 제도가 앞으로도 그를 허용할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둘째,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국가간 제도 경쟁이 치열했고 그 최종 모델은 서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세계 각국 기업들이 미국식의 기업지배구조를 기초로 각국의 특수 사정을 반영했다. 그런데 미국식 모델의 핵심은 (소수)주주권을 법률로 강력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비미국기업들은 자국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제도를 고수하기는 했지만 주주이익 중심의 기업지배구조라는 기본적인 토대는 존중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제 글로벌 시장이 축소되게 되면 그 원칙을 지금만큼 존중할 필요가 없어지고 자국 고유의 모델에 더 주목할 여유가 생긴다.
신지정학 시대에는 국제적 M&A도 필연적으로 후퇴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M&A는 규제해 왔는데 향후 그 이익과 영향의 범위가 더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안보 개념도 재정립될 것이다. 종래 방위산업이나 에너지 중심에 서 AI, 위성 등 첨단 기술과 천연자원까지 포함하는 내용으로 이미 확장되고 있다. 세계 모든 대기업들은 M&A를 포함한 여러 사업의 리스크 관리 내용과 범위를 재정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정체성 문제가 있다. 글로벌 경제에서는 특정 기업의 정체성이 별다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다. 특정 기업의 대주 주가 누구이고 경영자가 누구이며 주주들과 생산시설, 고객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 등등의 문제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롯데그룹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가 있었지만 잠깐이었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향후 기업의 정체성 문제는 더 자주 떠오를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틱톡(TikTok)의 정체성 논란이다. 트럼프 정부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틱톡을 금지했고 바이든 정부는 복귀시켰다. 결국 미국 의회가 2025년 1월 15일부로 틱톡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신지정학 시대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 문제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소수주주 보호, 이사회 중심 경영 등 큰 원칙에는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주구성과 글로벌 사업, 기업금융의 형태와 내용이 바뀌면서 그 구체적 운용 방법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영향을 받을 것이고 한국 기업들은 그 내용에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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