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09년 08월 07일 08:3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국기업평가가 지난 3일 한진해운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A+'에서 'A0'로 한 단계 하향 조정했다. 지난해 금융위기이후 경기침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실적이 악화됐다는 이유에서다. 업황은 나빠지는 데 선박투자를 늘리면서 재무 부담을 키운 것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해운업은 보통 3~4년의 경기 순환 주기를 형성하고 있다. 경기가 활황일 때 수출입 물동량이 늘어나는 대표적인 경기민감 산업이다. 보유하고 있는 선박 규모가 큰 회사일수록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다. 선박 구입 등의 초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진입장벽도 높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업황이 꺾이면 사실상 영업으로 수익을 거둘 방법이 없다. 대처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계열사 등을 이용해 고정 매출처를 다수 확보 하거나 경기 변동에 민감하지 않은 특수선을 운영하는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의 해운 회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해운 회사는 돈을 벌면 선박투자와 내부 유보금을 적절하게 가져가면서 향후 위기에 대비하기 바쁘다.
자칫 경기예측이 빗나갈 경우에는 업체 간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대개의 해운 회사는 호황기 끝물에 선박 투자를 늘려 재무 부담을 키우기 일쑤다. 3~4년을 주기로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고정비용을 줄이는 데 안간힘을 쓴다.
투자자들도 이런 해운업의 특성을 감안해 투자시기와 규모를 조율한다. 특히 기업의 채무불이행 여부에 집중하는 회사채 시장에서는 업황이 호황기를 맞을 때 해운 회사가 리스크 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주목한다. 신용평가사들도 이를 감안해 기업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긴다.
한기평이 한진해운의 신용등급을 조정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기평의 이번 등급 하향은 늦은 감이 있다.
해운업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긴 불황의 터널에 진입했다. 갑자기 찾아온 불황이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세계 무역 등을 생각하면 해운업계의 미래는 당분간 어둡다.
해운 경기는 단지 꺾였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너무도 '가파르게' 꺾였다. 호황기에 대대적으로 실시한 투자로 이제 해운사마다 '노는 배'가 넘치게 됐다. 물동량 감소로 돈 벌 길은 없는데 갚아야 하는 선박대금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마디로 빚 갚는 능력이 예전과 같을 지 심히 의심스럽다. 해운사가 발행한 채권가격은 신용등급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떨어진지 오래다. 채권 투자자가 신용평가사가 매긴 등급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금리는 고사하고 아예 발행조차 되지 않았다. 완전 자본잠식에 빠졌던 재무제표는 어느날 갑자기 개선됐지만 정부의 회계기준 변경에 따른 화장발 이라는 게 채권시장의 공감대다.
사실 신용평가사는 이런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침묵했다. 어쩌면 참아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신평사 애널리스트는 최소한 최근 반년 이상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 거다.
신용평가사로서는 유동성 위기에 몰렸던 해운사들의 사정을 봐 준 것일 수 있다. 정부와 금융시장, 기업의 눈치도 봤을 것이다. 충분히 자금을 확보할 때까지 기다린 후 등급 조정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을 수 있다. 물론 투자자의 위험을 담보로 한 기다림이다.
어쩌면 지금에라도 등급 조정이 이뤄진 것이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특히 신용등급 체계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무너진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토대가 되길 바란다.
한기평이 해운사 등급 검토에 나섰지만 사실 어느 정도나 메스를 댈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현재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다른 신용평가사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안갯속이다. 항간에는 해운사 등급 조정이 한진해운으로 끝일 것이란 얘기도 떠돈다.
신용평가사가 자신들 고유의 방법론으로 일관된 논리를 적용해 등급을 결정한다면 왈가왈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정도'를 재는 일엔 반드시 상식과 공감대가 필요하다. 정말 '일관된' 방법론이 적용되고 있는지도 곱씹어봐야 한다.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해운사 신용등급을 올려줄 때 내세웠던 근거들은 여전히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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