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09년 11월 25일 09:3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피라미드처럼 생긴 메트로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똑딱'거리는 소리와 좌우로 움직이는 바늘이 일정한 박자를 알려주는 이 기계는 베토벤이 작곡의 속도지시용으로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아노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박자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음표 읽는 것이 익숙지 않다 보니 손가락이 건반을 따라가지 못한다. 연주하는 게 정말 그 유명한 곡인지 의심이 날 정도다. 그래서 일정한 박자를 알려주는 메트로놈은 피아노 연습과정에서 필수도구다.
그런데 이 메트로놈이 고장이라도 나면 큰 일이다. 처음에는 미묘한 차이라 인지하지 못하지만 계속 엇박자에 따라 연주하게 되면 결국 원곡과 전혀 다른 곡이 '탄생'한다. 최근 LH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의 채권발행 과정도 고장난 메트로놈을 연상케 했다. LH공사의 '서두름'과 정부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엇박자였다.
LH공사는 지난 6일 창립 이후 첫 채권발행을 위해 공개입찰을 시도했다. 5년 만기로 1000억원 발행에 나섰지만 투자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응찰은 절반수준인 500억원에 그쳤다. LH공사는 결국 이를 유찰시켰다.
과거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주요 발행사들이었지만 이들이 통합한 LH공사의 채권발행은 국내 채권시장에서의 '의미있는' 첫번째 자금조달이었다. 이에 LH공사 자금담당자들은 국민연금, 농협, 삼성생명 등 국내 채권시장의 '큰 손'들을 직접 찾아 다니며 홍보에 집중했다.
토공과 주공의 채권 상당량을 보유하고 있는 '큰 손'들은 투자풀 조정이 힘들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재무건전성이 악화된 LH공사에 투자하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통합 이전부터 공사 담당자들은 기관들의 투자기피를 예측, 정부에 자금유치의 어려움을 여러 차례 호소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높은 발행금리를 제시하고 만기를 조정해 알아서 채권을 발행하라고 하는 것이 유일한 '지시'였다.
정부는 채권발행이 유찰돼서야 그 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LH공사의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으면 정부가 진행 중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LH공사는 한 해 현금유출만 약 50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추진 중인 임대 및 보금자리주택사업은 큰 부담이다. 이 같은 사업규모는 곧바로 자금수요 확대로 이어진다.
이지송 신임 LH공사 사장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듯 취임 직후 사업규모를 줄이려고 했지만 그 규모는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업계 관계자는 "이는 건설경기 활성화를 통해 경기부양을 노리고 있는 정부와 지역활성화 도모를 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LH공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외부에서 휘둘리는 LH공사의 재무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는 정부가 최소한 보증을 제공하거나 설립법 상으로 손실보전을 해주는 조항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처럼 공사 내 임대사업 부문 계정을 분리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LH공사도 자체적으로 문제점을 인식해 연 1조~2조원 규모의 △해외채권 발행 △복리채 및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등 다각화된 자금조달 방식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자금조달의 핵심인 국내 채권발행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런 방안들도 무용지물이다.
LH공사의 채권발행 유찰은 공사채가 무조건적인 투자처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다. 결과적으로 LH공사는 수요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발행을 밀어 부쳤고, 정부는 부정적인 상황을 보고 받았으면서도 무관심했다.
LH공사는 이후 다시 채권발행에 나섰고 지난 16일 10년 만기 2800억원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또 추가발행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고장난 메트로놈처럼 계속 엇박자를 낸다면 처음에는 인지를 못하겠지만 그 파장은 단순히 채권발행 실패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LH공사와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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