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0년 04월 14일 08:43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상장 대기업의 '쓴 소리' 회피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다. 신용평가사를 들쑤시며 등급을 올리는 등급 쇼핑과 또 다른 양상이다.
사업·재무적 약점을 꼬집고 크레딧 리스크(신용 위험)를 꼼꼼하게 점검한 뒤 의견을 내놓는 평가사를 일부러 피하는 모습이다.
한국기업평가는 조선·해운업계에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신평사다. 경기 침체에 따른 각 업체별 영향, 불거질 크레딧 리스크, 앞으로 전망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픈 소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적정 등급에 대해 시장에서 말만 무성했던 한진해운의 신용등급을 국내 신평사 중 처음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올 들어서는 증권사·자산운용사 크레딧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조선업 관련 비공개 세미나도 진행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발행사인 기업 입장에서야 불만이 많다. 제 아픈 곳을 후비고 꼬집는 데 탐탁하게 생각할 리 만무하다.
불만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엔진업체를 중심으로 한기평에 등급평가를 의뢰하지 않는 경우가 속출하게 된 것.
국내에서는 회사채 등급 복수평가제에 따라 기업이 두 개 이상의 신평사를 선택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평사는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최근 STX엔진·두산엔진이 잇따라 회사채 발행에 나섰지만 한기평에는 등급 평가를 의뢰하지 않았다. 한기평은 한진해운을 포함한 이들 기업의 신용등급을 신규로 평가하지 못한 채 유효등급만 관리하는 상황이다.
덩치 큰 몇몇 기업이 떨어져 나가자 한국기업평가의 점유율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2007~2008년 고수해온 점유율 1위도 지난해 기준으로 내주게 됐다.
'알람(alarm) 역할'을 해야 할 신평사가 제대로 기업을 평가할 기회와 소통 채널마저 박탈당한 셈이다.
평가 수수료라는 칼자루를 쥔 발행사의 이 같은 행태가 지속되면 결국 손해는 고스란히 시장과 투자자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메이크업(makeup)'된 보고서로 인해 안전하다 믿던 기업이 한 순간에 휘청거리면 파생되는 문제들이야 불 보듯 뻔하다.
시장 일각에서는 발행사의 횡포를 막고 신평사가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신평사 순환 지정제'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평가를 담당할 신평사를 지정해주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순차적으로 교체하는 식이다. 신평사에 할말은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주자는 의미다.
신평사도 기업이다. 매출·실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평사의 약점을 이용해 입맛에 맞지 않는 평가를 외면해버리는 발행사의 꼼수가 곱게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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