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0년 08월 25일 07:3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프로페셔널 정보서비스 thebell이 만든 국내 최초 자본시장 전문 매거진 thebell Insight 창간호(제1호), 1st half of 2010 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물리치는 일반적 방법 세 가지; ①찌르고 기다린다. ②마지막 순간에 찌른다. ③계속 찌른다.
고수만 아는 비방 두 가지; ④3갑자의 내공을 실어 찌른다. ⑤주변 숲의 나무를 모조리 이쑤시개로 만들어 버린다.
마지막 구절에서 빵 터졌다. 기상천외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관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리스크가 깃들만한 곳을 미리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남아의 어느 도시국가는 집 주변의 물웅덩이를 방치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무서운 질병을 옮기는 모기를 방제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란다.
직접 규제와 정보투명성 제고
최근 우리 당국이 내놓은 선물환 규제, 미국의 금융개혁법안, BIS의 은행규제 논의는 모두 맥락이 비슷하다. 금융위기의 전달경로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의 사뭇 다른 접근방식이 있다. 하나는 직접 규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당장은 직접규제의 효과가 보다 확실하다. 기세와 타이밍이 깔끔하고 정책의지도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직접규제는 여러모로 부담이 크다. 건전한 시장활동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 영악한 투기세력은 곧잘 우회로를 찾아 규제를 피해간다. 건전한 시장활동의 위축으로 투기세력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정보투명성을 높여 시장의 질서를 개선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해결방법이다. 정보투명성을 높이면 시장의 규율(market discipline)이 작동한다. 시장이 부실과 쏠림을 확인하면 잠깐은 친구 따라 장에 가는 대세 추종도 나타나지만, 결국은 자연스럽게 견제심리가 일어 자율조정(self-correcting)된다.
이러한 변화는 대지에 물이 스미듯이 서서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성과를 예상하기 어렵고 나중에는 무엇이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태반이다. 기본토양이 취약한 상태에서는 시장의 규율이 제대로 작동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마음 급한 당국에게는 이런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투명성의 혜택을 받는 시장은 무심해도 투명성이 불편한 쪽은 쟁점을 잘 알고 끊임없이 무력화를 시도한다. 도입할 때 정치적 동력을 얻기도 어렵지만, 세월의 침식과 마모로부터 지켜내기는 더 어렵다.
CP시장의 변신
먼저, 힘겹게 일궈낸 최근의 투명성 개선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이제 법제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단기사채다. CP시장의 제도적 틀이 기존의 기업어음에서 단기사채로 바뀌는 것이다. 제도적 모호함과 거래의 불편함은 해소(권면분할 등)되고 정보투명성(거래정보 공유)과 거래안정성(한도발행; Program amount)은 크게 개선된다. 2008년 신정부 출범 직후 금융위원회는 단기금융시장 제도개선을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단기사채 도입은 그 가시적 성과다. 정말 이런 성과가 불과 2년여 만에 이루어진 것인가?
한국예탁결제원이 CP시장 이슈의 공론화에 나선 것이 2003년 5월이었다. 연구자는 2008년 금융위 부위원장에 취임한 이창용 교수였다. 연구는 신용카드 위기가 CP시장의 취약한 정보투명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다. 위기 발생 이후 불과 2개월 지난 시점의 놀라운 통찰이었다.
강물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2004년 당국은 금융연구원의 연구용역을 바탕으로 CP시장 제도개선을 시행한다. 하지만 이는 은행연합회 중심의 정보집중에 그쳤고 실질적인 정보투명성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어음 특유의 형식 논리에 갇혀 CP가 자본시장 상품이라는 본질은 잊혀졌다.
그런 와중에 예탁원은 온라인으로 CP거래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CP의 예탁비중은 낮아도 그 가능성 때문에 모든 증권CP가 시스템에 등록되었고, 종금CP에 대한 신기보 출연료 부과 이후에는 거의 모든 CP가 예탁원에 등록되었다.
정보가 모이면 그 자체로 위력을 발휘한다. 예탁원이 직접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의 피드백으로 시장에서는 CP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발행기업들도 시장의 진화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 기업들의 유동성 리스크 관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2008년 이후 당국의 노력은 결국 이러한 시장의 진화를 제도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것도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자생적 진화로 일군 토대가 있었기에 비교적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예탁원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CP시장의 새로운 정보흐름을 기업 재무정책에 대한 코드로 끌어올린 더벨 등 언론매체의 활약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시정보의 퇴보
이제 반대 사례를 소개할 차례다.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전자공시시스템(DART, 금융감독원)은 가장 성공적인 정보공유 사례였다. 기업정보의 흐름을 일거에 바꾼 쾌거였다. 이후 금융통계정보시스템(금융기업, 금융감독원), 알리오(정부투자기업, 기획재정부), 클린아이(지방공기업, 행정안전부) 등으로 외연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공시정보의 수준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형식요건에만 치중해서 투자자를 위한 적극적 정보제공은 기대하기 어렵고, 심지어 다분히 의도적인 오류와 누락마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규제완화 차원에서 공시부담 경감에만 관심을 두는 당국에게 환경변화에 따른 제공정보의 능동적 확대와 보완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지도 모른다.
건설PF의 사례에서 보듯이 당국의 공시운용은 후행적이고 소극적이다. 어디 건설PF 뿐이겠는가? 조선사와 건설사의 선수금, 금융사의 특정산업 여신 편중, 주요 자산의 듀레이션과 LTV, 자산유동화 현황 등은 신용이슈에 접근하는 핵심정보지만 공시는 부실하기 그지없다. 내역을 공개해도 지나치게 두루뭉실하고 기타가 절반이 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선진시장이라면 당연히 공유되는 정보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영업비밀로 치부된다.
미국의 경우 WKSI(Well Known Seasoned Issuer)는 투자설명서를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작성할 수 있다(FWP; Free Writing Prospectus). 정보제공 내용을 줄이려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에게 보다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FWP를 이유로 투자설명서를 대충 작성하면 시장의 응징과 이해관계자의 소송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토양과 전통이 없다. 시장의 힘은 위대하지만 분산되어 있다. 투자자의 권익을 찾으려는 노력에는 곧잘 Black consumer(악성 민원인)의 색깔이 덧칠해진다. 선진국을 모방한 제도 도입은 겉돈다. 공정공시가 정보공개 회피의 수단이 되었듯이, 각종 투자자 보호제도는 본질과 다른 엉뚱한 용도로 쓰이거나 시간과 비용만 잡아먹는 괴물이 되었다. 이 모두가 시장의 힘이 모아지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줄탁동기(알을 깨기 위해 안팎에서 서로 쪼아줌)의 계기가 필요하다.
이럴 때 협회나 시민단체, 언론 등 제 3섹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동적 이벤트로는 시장의 진화를 끌어가기 어렵다. 시장은 흑백논리로 재단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시장과 눈높이를 맞춰야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시장의 진화에 필요한 것은 명망가의 3갑자 내공이 아니라, 숲을 모두 이쑤시개로 바꿀 만큼의 끈기 있는 문제 제기와 대안 모색이다.
이제는 알을 깨고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윤영환/신한금융투자/Credit analyst
칼럼니스트 소개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한국신용정보에서 13년간 근무했다. 한신정에서 화학산업평가실장과 연구개발실장 등을 역임한 후 2001년 신한금융투자로 이동했다. 현재 더벨의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다.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통렬한 분석으로 신용위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믿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 크레딧애널리스트의 본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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