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2년 03월 06일 10:3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2006년 LCD 제조업체 비오이하이디스의 몰락은 회사채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투자적격 신용등급(BBB-이상)이었던 회사가 불과 6개월만에 D(디폴트)로 떨어지는 바람에 이 회사 채권을 대대적으로 사들인 전국의 단위 새마을금고와 신협은 자칫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 손실에 직면했다. 비슷한 시기에 워크아웃에 들어간 휴대폰 제조사 팬택의 채권도 대부분 이들에게 팔려 충격은 두 배 이상이었다. 모 증권사에는 격노한 투자자들이 흉기를 들고 난입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욕은 신용평가사가 더 먹었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주범은 증권사였다. 상당수 증권사는 신용등급만 믿고 '안전하고 높은 금리를 주는' 채권이라며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정규 조직에 속하지 않는 임시 팀을 만들어 리스크관리나 크레딧에 대한 점검을 전혀 하지 않고 판 경우도 허다했다. 심지어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해당 채권을 팔았다는 사실 조차도 경영진에서 인지하지 못한 증권사도 있었다. 위험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수익만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채권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도 이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증권사가 있었다. 동양증권과 신한금융투자가 대표적이다. 두 증권사 모두 영업부서에서 비오이하이디스 회사채 인수를 강력히 추진했지만 내부적으로 격론을 벌인 끝에 '투자불가' 결정을 내렸다. 소속 크레딧애널리스트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특히 동양증권은 회사채 시장에 큰 위기가 올 때마다 귀신같이 도망가는 신기를 여러차례 선보였다. 2003년 LG카드 사태가 났을 때 다들 카드채를 가장 많이 취급한 동양증권을 걱정했지만 이미 발을 뺀 다음이었다. 한국판 서브프라임으로 일컬어지는 부동산PF를 채권화해 리테일 시장에 가장 먼저 선보인 것도 동양증권이었지만, 다른 증권사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2007년 이후 동양은 서서히 포지션을 정리 중이었다. 그 배후(?)에는 당시 류승화 팀장이 이끌던 크레딧분석 조직,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영업부서의 문화가 있었다.
국내 증권업계에서 동양증권과 같은 애널리스트 활용의 좋은 예는 아쉽게도 별로 없다. 오히려 (매우 미안한 표현이지만) 영업을 위한 도구 내지는 치어리더로 전락하는 경향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치밀한 관찰과 분석, 깊은 사유를 통한 탁월한 분석서비스를 증권사 내·외에 제공해야 하는 게 애널리스트의 사명이지만, 그 사명을 금과옥조로 삼다가는 되레 팽 당하기 십상이다.
A증권사의 경우 '고수들의 무덤'이라는 말까지 돈다. 물론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에 한한 얘기다. 당대 최고수로 평가받던 a씨는 이곳에서 1년을 버티지 못했다. 명석하기로 소문났던 b씨는 영업의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리서치를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왔던 c씨 역시 강단이 상당한 사람이었으나 얼마 전 이직을 선택했다.
B증권사의 크레딧 애널리스트 d씨는 요즘 마음고생이 한창이다. B사가 모 건설사에 투자했다가 크게 물렸는데 그걸 말리지 못한 d씨의 책임이 크다는 추궁 때문이다. 말리긴 말렸으되 귀담아 듣지 않았던 회사가 지금 펼치는 논리는 "더 강력하게 막았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이란다.
전통적으로 리서치가 강했던 C증권사는 명품 분석팀 하나를 사실상 와해시켰다. 깊은 통찰에서 나오는 훌륭한 보고서와 서비스 보다는 '영업에 도움이 되는' 리서치를 강요하는 새로운 방침은 애널리스트에게 '정신'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증권사에서 리서치와 영업은 따로 떼서 논할 수 없다. 주식을 팔아먹든 채권을 팔아먹든 애널리스트의 분석서비스는 필수적이다. 영업를 위해 애널리스트가 존재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섞일 수 없다. 애널리스트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면 립싱크하는 가수와 다를 바 없다. 좋은 투자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증권사의 존재 이유라면, 리서치에 기반해 영업을 일으키는 것이 정석이다. 영업을 위해 리서치가 미끼로 쓰이다 보면 결국엔 사단이 나고 만다.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한 때 승승장구하다 한 순간 이슬처럼 사라진 증권사들은 예외없이 당장의 이익과 실적에 눈이 멀어 기본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런 증권사는 신뢰를 잃거나 스스로 큰 사고를 치고 저절로 망해 온 것이 금융의 역사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best clicks
최신뉴스 in 전체기사
-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윤승규 기아 부사장 "IRA 폐지, 아직 장담 어렵다"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셀카와 주먹인사로 화답, 현대차 첫 외국인 CEO 무뇨스
- [북미 질주하는 현대차]무뇨스 현대차 사장 "미국 투자, 정책 변화 상관없이 지속"
- 수은 공급망 펀드 출자사업 'IMM·한투·코스톤·파라투스' 선정
- 마크 로완 아폴로 회장 "제조업 르네상스 도래, 사모 크레딧 성장 지속"
- [IR Briefing]벡트, 2030년 5000억 매출 목표
- [i-point]'기술 드라이브' 신성이엔지, 올해 특허 취득 11건
- "최고가 거래 싹쓸이, 트로피에셋 자문 역량 '압도적'"
- KCGI대체운용, 투자운용4본부 신설…사세 확장
- 이지스운용, 상장리츠 투자 '그린ON1호' 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