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계약 관행에 일대 변화 예고 ①대법원 "신의성실 원칙보다 사적 계약이 우선"
권일운 기자공개 2015-11-30 06:00:00
[편집자주]
국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의미있는 판결이 최근 나왔다. 거래 당사자가 진술 및 보증(Representations & Warrnaties) 조항 위반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인데, 이 판결로 향후 M&A 거래들의 계약서 협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더벨은 총 3회에 걸쳐 이 판결의 의미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이 기사는 2015년 11월 18일 10시48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판매자가 "하자가 없다"고 호언장담한 중고차를 샀다가 나중에 결함이 발견됐다면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일단 계약 체결에 앞서 판매자가 직접 품질 보증서를 작성, 제공한 일이 있었던 까닭에 당연히 피해 보상을 요구해도 될 듯 하다.하지만 구매자가 해당 결함 또는 결함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사전에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구매 의사를 철회하거나, 결함이 있는 만큼 가격을 깎으면 되지 않겠냐고 항변할 수 있어서다.
이런 일이 수백억 원이 오간 기업 인수합병(M&A)에서 발생했다. 지난 1999년 이뤄진 현대오일뱅크의 옛 한화에너지 인수 과정에서다. 현대오일뱅크는 한화에너지를 인수한 뒤 담합을 이유로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이로 입은 피해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한화그룹 측은 현대오일뱅크가 한화에너지의 담합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배상을 거부했다.
현대오일뱅크와 한화그룹은 결국 법정에서 맞붙게 됐다. 1심은 현대오일뱅크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은 한화그룹 측의 논리가 합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15일 대법원이 내린 "주식양수도계약상 진술 및 보증 조항 위반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로 현대오일뱅크의 승리로 끝이 났다.
◇ 위법사실 사전 인지한 현대오일뱅크, 진술과 보증 위반 이유로 손배소
현대오일뱅크는 1999년 4월 한화로부터 한화에너지 주식 135만 주를 497억 원에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양 측은 계약서에 "한화에너지가 행정 법규를 위반한 사실이 없고, 이와 관련해 행정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진술과 보증을 삽입했다. 한화는 진술과 보증 위반 사항이 나타났을 때에는 최대 500억 원을 보상키로 했다.
해당 거래가 완료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 한화에너지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군납 유류 입찰 담합을 이유로 475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과징금 액수를 145억 원으로 감경받긴 했지만, M&A 규모에 비해서 절대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에 현대오일뱅크는 앞서 체결한 진술과 보증을 토대로 한화 측에 322억 원을 배상하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변수는 인수자인 현대오일뱅크 측이 해당 담합 행위의 참여자 중 하나였던 까닭에 한화에너지의 담합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를 이유로 재판부는 현대오일뱅크를 이른바 '악의의 매수인'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악의라 함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상대방의 진술과 보장 위반 사실을 일부러 몰랐거나, 모른척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이에 한화 측은 "악의 또는 과실로 하자를 알지 못한 매수인의 경우 하자로 인한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의 민법 제 580조 1항의 단서 조항을 준용해 자신들의 논리에 힘을 보탰다. 담합 행위자 중 하나인 현대오일뱅크가 한화에너지의 공정거래법 위반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 경우 배상이 불가능하다는 게 한화 측 입장이었다.
◇ 대법원 "신의성실 원칙 보다는 M&A 당사자 간 계약이 우선"
1심은 현대오일뱅크의 승리였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민법 580조 1항 단서를 한화에너지 M&A에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 한화 측의 논리를 무력화시켰다. 또, 담합 과징금과 같은 특정 사안의 경우 진술과 보증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점이 명시돼 있지 않는 한 인수자가 면책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2심의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서울고등법원은 인수자가 진술과 보증 위반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를 거래 협상 카드로 활용하거나, 매매 가격에 반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현대오일뱅크가 진술과 보증 위반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협상 과정에서 반영하지 않은 것은 공평 및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게 2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최종심인 대법원은 다시금 현대오일뱅크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계약서에 진술 및 보증 위반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된다"는 내용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또 2심 재판부 판결의 핵심인 신의성실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통념 내지는 일반원칙일 뿐 사적 계약상 책임보다 앞서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 거래 가격에 진술과 보증 위반에 따른 손해 반영했는지가 쟁점
1심과 2심을 거치는 동안 재판 결과는 반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각각의 재판부가 손해배상이 합당한지를 판단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한 부분은 한화 측의 진술과 보증 위반이 가격을 포함한 거래 조건에 어느정도로 반영됐는지였다.
실제로 현대오일뱅크 측은 담합을 이유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계약 체결 당시만 해도 담합이 적발당하거나, 담합 적발로 인해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현대오일뱅크와 한화 양 측 모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를 선뜻 거래 가격에 반영하기에도 어려움이 었었다.
1심 재판부는 거래 금액을 정할 당시 양 측 모두 모두 과징금을 부과 받거나 이로 인한 손해배상 발생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봤다. 따라서 1심 재판부는 현대오일뱅크는 매수인이 담합 사실을 일부러 모른척 했다고 하더라도 거래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현대오일뱅크가 한화에너지의 담합 참여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가격 반영의 기회라고 간주했다. 현대오일뱅크가 제기한 소송에 대해 "담합 사실을 알고있다는 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를 가격 협상에 반영할 수 있었음에도 방치한 뒤 뒤늦게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여긴 것이 서울고등법원의 결론이었다.
3심을 맡은 대법원은 진술과 보증을 계약에 삽입하고, 위반시 최대 500억 원을 배상하기로 한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판단했다. 또 500억 원이라는 배상 한도를 둔 것 자체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손해를 미리 거래 가격에 반영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대법원은 진술과 보증이라는 불확실성 배분 장치를 두고 손해배상 형태로 거래 대금을 조정할 수 있게끔 한 자체가 거래 당사자 각각의 이해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봤다. 진술과 보증을 둔 것 자체가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결정이었던 만큼, 위반 사항이 발생했을 때 손해 배상을 이행하는 것이 진술과 보증의 존재 목적에 부합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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