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규제 등장, 은행 신탁 패러다임 전환 '성장보다 내실' [기로에 선 은행 신탁업] ①판매잔액 40조로 제한…조직개편+재산신탁·ELT 중심 라인업
손현지 기자공개 2019-12-27 11:21:29
[편집자주]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를 계기로 은행권 신탁사업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있다. 금융당국이 은행 신탁을 총량규제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방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비이자수익 확보 차원에서 신탁사업으로 눈을 돌리던 은행들은 공격적인 비즈니스 행보를 멈추고 신탁리스크 관리조직을 신설하는 등 조직개편에 나서는 모습이다. 5대 은행 신탁사업의 기류 변화를 살펴봤다.
이 기사는 2019년 12월 24일 10:1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운명의 날이었던 12월 12일. 은행권 신탁업 담당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융당국이 완강하게 밀고 나가던 은행 신탁판매 '금지' 기류가 '허용'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파생결합상품(DLS·DLF)에 이어 신탁상품까지 포기해야 할 뻔했던 은행들은 그야말로 기사회생한 셈이다.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온 양적성장과 상품 다양화 기조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당국은 논란의 쟁점에 있던 주가연계신탁(ELT) 판매를 조건부로 허용해준 대신 자산취급 한도범위를 올해 11월 말 기준 잔액(40조원) 수준으로 제한했다. 상품 판매시 고령층(70세 이상) 대상으로 진행하던 녹취절차를 전 고객층에 적용하는 등 리스크 완충장치도 요구했다.
그 이후 은행권의 신탁 비즈니스 행보는 확실히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경쟁적으로 자산 확대에 주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국의 가이드라인과 고객보호에 초점을 맞춰 조직개편에 집중하고 있다. 상품도 라인업 다변화 기조에서 벗어나 내실 다지기에 나섰다. 한 번 더 기회를 얻은 만큼 당국의 입장 변화를 어느 때보다 예의주시 중이다.
◇조직개편 관심 집중, 리스크 완충장치 마련
은행권의 신탁사업 변화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A은행 신탁담당 임원은 당국의 신탁 판매금지 가능성을 본 이후엔 수익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그저 판매허용에 의의를 두고 있다"며 "은행 자발적으로 소비자보호 강화장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새로운 리스크방지 제도나 관리인력을 보강하는데 역량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조는 조직개편에 반영되고 있다. 우리은행은 은행권 최초로 신탁조직 자체를 자산관리그룹에 흡수시킬 예정이다. 기존 WM그룹과 신탁연금그룹을 일원화해 자산관리그룹 산하에 두는 방식이다. 다만 WM부-신탁부는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이다.
신한은행의 경우 신탁그룹 조직개편을 막판까지 고심하고 있다. 기존 WM그룹과의 일원화도 검토했지만 신탁업의 특성상 WM-신탁업권 간 이해상충 이슈(차이니즈 월)를 해결해야 하는 등 법리적인 문제 탓에 여러 측면에서 타진 중이다. 이미 올 초 신탁그룹, 신탁본부 내 신탁사업부와 신탁운용부를 단일본부체제로 통합 운영한 바 있다는 점에서 현 체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농협은행은 신탁조직을 현 체제 그대로 유지한다. 대신 신탁수익 목표를 올해(전년대비 40% 증진)보다 내려잡을 방침이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은 아직 조직개편안을 완성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은행의 경우 DLF사태와 상장지수채권(ETN) 제재 등 악재가 겹친 상황이라 큰 폭의 조직변화가 예상된다.
업무 프로세스 개편과 신탁리스크 조직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내부적으로 불완전판매를 지양하기 위한 업무 프로세스 개선, 영업현장에 완전판매문화 확산 방안 등을 논의 중이다. 농협은행은 금융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신탁부 내에 '신탁투자자보호 대책반(가칭)'을 마련할 계획이다.
국민은행의 경우 2012년 선제적으로 '신탁리스크팀'을 설치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 별도의 조직개편을 시행하기보다 신탁본부 내 애자일(Agile) 조직을 구성, 상품 리서치부터 중위험 대체투자상품 등 안정투자상품 공급에 주력키로 했다.
은행권은 더 나아가 상품 진열대 역시 재정비에 나섰다. 대부분 리스크 부담이 적은 재산신탁과 수익성이 좋은 ELT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허용한 범위의 공모 ELT와 함께 상장지수상품(ETP)의 판매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그간 늘려오던 ETF·ETN 상품 잔액을 축소하는 대신 재산신탁과 ELT 투트랙 전략을 취한다는 방침이다. 농협은행은 포트폴리오상 비중이 높은 수시입출금식특정금전신탁(MMT)뿐 아니라 고객 니즈에 맞춘 차별화된 ELT 상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신탁, '짭짤한 비이자수익원'…DLF의 10배 수익
은행권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신탁사업을 놓지 않은 이유는 어렵게 키워놓은 '알짜배기' 시장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산 5조원이 채 안 되는 DLF 판매로 은행에 떨어지는 수수료율이 1%라 가정할 경우 금액으로는 400억~500억원 수준이다. 반면 신탁(자산 40조원 수준)의 경우 그 10배(4000억~5000억원)에 달하는 수수료수익이 창출되는 사업이다.
신탁은 고객이 주식, 채권, 예금, 부동산 등의 자산을 맡기면 신탁회사(은행)가 일정기간 운용해주는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다. 기본적으로 투자보다 자산을 보관하는 서비스 성격이 강하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대마진 대신 은행권의 새로운 비이자수익원으로 떠올랐다.
B은행 신탁부문 관계자는 "신탁상품은 은행마다 아이디어 경쟁을 통해 라인업을 다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최근 들어 은행자산관리 부문에서 핵심사업으로 부상할 수 있던 배경"이라고 말했다.
접근성 측면에서도 증권사에 비해 유리하다. 신탁은 일반적인 펀드상품과 달리 비대면 채널 통해 가입할 수 없다. 가입을 하려면 반드시 오프라인 점포를 찾아야 하는데 점포수가 증권에 비해 월등히 많은 은행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6월 말 기준 전 금융권 신탁재산(924조원)에서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49.7%(459조원)에 이른다. 증권사는 24%, 부동산신탁사 24%, 보험사 2.4%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신탁상품(공모형) 판매를 제한하겠다고 경고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당국은 DLF 사태로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규제 강화에 나섰는데 유가증권 등에 투자하는 특전금전신탁 등 일부상품도 여기에 속한다고 봤다.
당국이 엄포를 놓은 지 일주일 뒤인 지난달 25일. 주요은행 신탁판매 담당임원들은 금융위로 발길을 모았다. 한 목소리로 신탁판매 허용을 읍소하기 위해서다. 2017년 신탁 실무자들이 공동으로 당국에 '신탁업법 분리' 요구를 한 이후 처음 나타난 집단행동이다.
은행권의 간곡한 설득 끝에 당국은 결국 입장을 선회했다. 다만 내년 2~3월 신탁 테마검사를 예고했으며 체질개선 차원의 법률개정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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