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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운용을 움직이는 사람들]‘작은 거인’ 김병모, 33년 파수꾼 그리고 선봉장③꼼꼼하고 신중한 영업·마케팅 리더...'거안사위' 철학, 조직 안팎 선후배 두터운 신임

김시목 기자공개 2020-09-03 13:05:29

[편집자주]

1974년 국내 최초 투자신탁사(한국투자신탁)를 모태로 한 한국투자신탁운용의 50년 역사는 국내 투자신탁 및 자산운용 업계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한국투자금융그룹(구 동원그룹)에 인수된 이후 더욱 가파른 성장을 이어오며 국내 굴지의 자산운용사로 발돋움했다. 캡티브 수요없이 일궈낸 고객자산 70조, 순이익 400억원은 국내 유일무이한 성과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중심에서 성장과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이 기사는 2020년 08월 31일 13:3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자그마치 33년. 전통 제조업에서는 흔하지만 인력 유출입이 잦은 운용업계에서 오롯이 한 곳에서만 적을 두고 헌신한 이는 드물다. 260명 안팎의 조직 내부에서도 단 한 명뿐이다. 다소 왜소한 체형, 우직한 인상과 달리 입을 떼면 오랜 업력으로 쌓은 남다른 영업 내공과 마케팅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김병모 한국투자신탁운용 전무(사진) 이야기다.

그는 한국투자신탁운용 역사의 산증인이다. 옛 한국투자신탁이 시장에 자리잡는 과정, 한국투자금융그룹(구 동원그룹)에 인수된 후 비약적 발전을 이루는 동안 늘 조직과 함께 했다. 삼성그룹주 펀드, 네비게이터 펀드, 공적·민간 연기금풀 운용 등 기록적 순간엔 늘 선봉장이었다. 공은 모두 견고한 조직과 출중한 선후배 덕으로 돌리는 천상 파수꾼이다.


◇ 일문학도서 운용사로, 주어진 자리 올인 '거안사위'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달리 쑥스러움도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향이 강했다. 부모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따랐다. 어른들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의 ‘순둥이’에 가까웠다. 덕분인지 공부도 잘하는 축에 속했고 이대로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대학 입학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진 그랬다.

변곡점은 1학년 때였다. 재학 중이던 성남고등학교 유도부에 입문한 뒤부터다. 운동을 좋아해 동호회 성격으로 취미 삼아 들어갔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전문 체육인을 양성하는 운동부 성격에 가까웠다. 당시만 해도 운동부에서만 선후배 간 위계가 엄격했고 체벌도 흔했다. 매일매일이 힘들 정도였다. 최고참(3학년)이 돼서야 간신히 빠져나왔다.

김 전무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너무 힘들었다”며 “잘하던 학교 성적은 그대로 떨어졌고, 육체적인 것은 그냥 참겠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어 “긍정적으로 보면 엄격한 규율과 기강을 통해 한 템포 빨리 익힌 시기”라며 “3학년에 입시에 올인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학에선 일어일문학과를 전공했다. 원래 외국어를 좋아했지만 영어보다는 일어에 대한 희소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금융사인 한국투자신탁운용(당시 한국투자신탁)으로의 입사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직업으로서 특별하게 큰 꿈이 없었던 만큼 이왕이면 연봉이 높은 곳을 택하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1987년,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남들 다하는 ‘별 달기(임원)’란 원대한 포부는 없었다. 그저 연차나 직급에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업무를 진행하거나 결정할 때 누구보다 신중하고 꼼꼼했다. 물론 상사의 미션이나 요구에 관한 한 만사를 제쳐뒀다. 큰 욕심은 없었지만 맡은 일을 척척해낸 덕인지 영업, 리서치, 마케팅, 운용, 심지어 홍보까지 곳곳에서 업무를 익혔다.

그는 항상 운용사를 비롯, 업계 흐름과 트렌드를 촘촘히 분석하는 습관이 있다. 자금 유출에 대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시장 영향)을 하는 후배는 혼이 나기 십상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여러 입을 거쳐 이중·삼중 크로스체크를 거친다. 이를 토대로 불가항력 악재엔 '타격은 최대한 늦고 적게, 회복은 가장 빠르고 많게'를 실행한다.

김 전무는 “사회 초년생만 해도 신중하고 꼼곰했던 탓에 때론 ‘눈치없다’는 얘기도 들었다(웃음)”며 “연차와 경력이 쌓이면서 오히려 ‘믿음직스럽다’란 소리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물론이고 직장 생활 내내 평안할 때에도 위험과 곤란이 닥칠 것을 생각하며 잊지말고 미리 대비한다’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자세로 항상 임했다”고 덧붙였다.

◇ 실무자 신뢰 '용인불의' 스타일, 그룹 내 두터운 신임

그는 해외투자팀장을 마지막으로 2000년부터는 현재 맡고 있는 CMO(Chief Marketing Officer) 관련 조직에 모두 몸담았다. 2001년 마케팅팀장을 맡아 법인, 리테일 비즈니스를 도맡았다. 이후 2004년 법인영업팀장, 2008년부터는 기관영업본부장을 역임했다. 2016년부터는 한국투자신탁운용의 마케팅 및 영업조직을 총괄하는 자리를 이끌고 있다.

다양한 실무를 거쳐 책임자 자리에 오른 김 전무는 담당 실무자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믿고 맡긴다. 영업 및 마케팅 조직 내 의사결정을 책임지지만 그 전까지는 실무자들의 역량을 신뢰한다. 흡사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이 그룹을 이끌면서 임직원들에게 앞장서 펼치고 있는 ‘용인불의(用人無疑)’ 리더십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한국투자신탁운용 한 직원은 “업무에 관한 한 다른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주문과 독려가 많은 편이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는 최대한 직원들의 역량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라며 “문무를 겸비한 조홍래 사장이 카리스마형 리더십이라면 김 전무는 외유내강형”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사의 미션에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면서 신임이 두텁다”고 덧붙였다.

어찌보면 조직의 오랜 시간과 지배구조가 바뀌는 순간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던 점은 그의 업무 성향이나 스타일과도 닿아 있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승진을 위한 후배 압박 등보다 유연하게 후배들을 이끌어가면서 성과를 꾸준히 내왔다. 그룹이나 오너, 사장 입장에서도 여러 측면에서 모나지 않은 스타일의 김 전무를 꾸준히 믿고 지지하는 근간이다.

조직에 있으면서 만들어낸 쾌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최초’와 ‘유일’이란 수식어를 따낸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공적(2012년) 및 민간(2015년) 연기금풀을 모두 운용하는 유일한 곳으로 올라선 뒤 올해 7월에도 지위를 지켰다. ‘삼성그룹주펀드’, ‘네비게이터펀드’ 등 조단위 주식형 펀드와 최초 해외 ‘베트남펀드’, 일본 '부동산펀드' 등에서도 늘 선봉을 맡았다.

물론 김 전무는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조직과 수장(조홍래 사장), 운용 및 영업 실무진들이 합심한 결과물로 설명한다. 과거 한국투자증권과의 합병 후 조직 결속, 각종 운용사 성과 창출 등이 모두 그랬다. 단순히 겸손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을 가장 오랜 기간 지켜온 조직의 파수꾼으로서 그가 일해온 방식이었다.

그는 “일본 부동산 펀드를 초기 론칭할 당시 제가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게 상당한 도움이 됐다”며 “모든 그림을 갖고 학사 학위를 딴게 아닌 것처럼, 30년 이상 한 조직에 몸담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운도 좋았고, 출중한 선후배 동료들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묵묵히 CMO 역할을 해내는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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