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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I채권 인증기관의 딜레마 [thebell note]

이지혜 기자공개 2021-02-04 12:59:06

이 기사는 2021년 02월 02일 07:5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우리가 등급(AAA)을 안 주면 곧바로 경쟁사를 찾아간단 말이에요. 세상 이치가 그런 걸 우리더러 어쩌란 거죠?.” 영화 ‘빅쇼트’의 대사다. 은행권이 원하는 AAA 채권비율을 승인하거나 부실채권의 신용등급을 내리지 않은 신용평가사 S&P를 주인공이 비판하자 S&P 직원은 이렇게 답했다.

경쟁이 자정작용을 일으키기보다 부패를 가속화할 때가 있다. 특히 감시나 규제 없이 시장이 과점될 때 그렇다. 최근 회계법인과 신용평가사들의 SRI채권(사회책임투자채권, ESG채권) 인증사업을 바라보며 기시감이 드는 이유다.

2020년 한국신용평가를 시작으로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까지 SRI채권 인증사업에 뛰어들었다. 2018년 이후 이 시장은 빅4 회계법인이 점유해왔지만 현재 의욕을 보이는 회계법인은 딜로이트안진뿐인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딜로이트안진도 핵심인력을 영입해 사업을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SRI채권 인증시장이 사실상 딜로이트안진과 신용평가3사의 4파전 구도를 이룬 셈이다. 4개사 모두 이제야 첫발을 뗀 시점이지만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은 무겁다. 이 때문인지 석연찮은 뒷말까지 나돈다.

“인증 비용을 받지 않는다”, “우리한테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우니까 다른 기관으로 갔다”, “사실과 다르게 서류를 조작하라고 제안했다더라” “신용평가사들이 최고등급을 퍼줄 수밖에 없다더라” 등등.

SRI채권 인증(사전검증)은 ‘이 채권이 일반채권과 달리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 쓰인다’고 밝혀주는 유일한 장치다. 인증기관은 기업이 SRI채권을 발행하기 위해 거치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관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증기관의 신뢰성에 대한 의심은 자칫 SRI채권 시장의 뿌리부터 흔들 수 있다.

그러나 인증기관을 견제할 수단은 없다. 환경부가 자격기준을 만들기로 했지만 빨라도 올해 하반기는 돼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K-텍소노미(한국형 녹색금융 분류체계) 공표시점도 지난해 말에서 올해 6월 이후로 늦어졌다. 사회적채권의 경우 분류체계를 마련하려는 시도조차 없다. 인증기관의 판단에 따라 SRI채권인 줄 알았는데 텍소노미가 발표되고 보니 아니었다는 상황이 불거질 수도 있다.

그나마 신용평가사가 금융감독원에 정기점검을 받지만 평가방법론 부합여부까지 보는 부서는 신용평가쪽 뿐이다. SRI채권 인증은 PF/사업가치/투자평가본부에 속해 있어 SRI채권 평가방법론 부합여부까지 점검받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SRI채권을 마구 인증하면 위상이 떨어진다. 까다롭게 굴면 오는 손님을 경쟁사로 내치게 된다." SRI채권 인증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증기관의 자정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인증기관이 기업과 한통속이라는 편견이 생기면 이제 막 끓어오르던 시장에 찬물이 끼얹어질 수 있다. 이들의 딜레마를 해소할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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