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I채권시장 진단]ESG 관련 금융상품 다양화, 채권은 ‘시작일 뿐’③론·PF·파생상품으로 확산 가능성…장기CP·사모채도 가능?
이지혜 기자공개 2021-04-09 13:08:22
[편집자주]
2021년 원화 SRI채권 시장이 연초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소수의 금융사와 공공기관 주도로 성장하던 시장에 민간기업이 앞다퉈 뛰어들었다. SRI채권의 진정성을 평가하겠다고 나선 인증기관도 늘었다. 빅4 회계법인이 지배하던 인증시장에 신용평가3사가 가세하며 시장의 판도변화가 점쳐진다. 그러나 화려한 팽창 뒤에는 사후관리 미흡 등 그림자도 있다. SRI채권 시장의 수급 요인을 점검하고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본다.
이 기사는 2021년 04월 08일 08:2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SRI(사회책임투자), ESG(환경·기업·지배구조)를 내세우는 금융상품이 다양해지고 있다. SRI채권 시장이 특히 그렇다. 종전까지 특수채와 SB(일반 회사채), FB(여전채) 중심이었지만 MBS(주택저당증권), ABS(자산유동화증권)로도 영역이 넓어졌다.SRI 대출이나 PF, 파생상품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린론의 경우 2019년 외화로 처음 조달된 이후 최근에는 원화로도 이뤄졌다. SC제일은행 등 외국계 은행이 최근 ESG 타이틀로 파생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일단 물꼬가 트인 만큼 다른 금융기관과 기업들도 이런 분위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SRI, ESG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금융상품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것이다. 만기 1년 이상의 장기CP(기업어음)나 사모 회사채 등 자본시장을 교란하는 금융상품에 SRI, ESG를 붙이면 혼란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거래소에도 상장되지 않아 SRI금융시장의 사각지대가 커질 수 있다.
◇채권 종류 다양화, ABS까지 합류
8일 한국거래소 사회책임투자채권 플랫폼과 더벨 플러스에 따르면 SRI ABS가 올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의 MBS를 제외하면 그동안 SRI 타이틀을 붙인 ABS는 전무했다. 그러나 신용보증기금이 올해부터 P-CBO를 사회적채권으로 발행하면서 특수채가 아닌 SRI ABS가 등장했다.
이로써 SRI채권은 SB와 FB 외에 MBS, ABS로도 영역이 넓어졌다. DCM의 대표적 네 가지 채권이 SRI 타이틀로 발행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민간기업이 머잖아 SRI ABS를 발행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은행 금융사들이 현재 그린론, 소셜론 등을 심도깊게 고민하고 있다”며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그린론이나 소셜론을 집행한 뒤 이를 기초자산으로 SRI ABS를 발행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말했다.
SRI 회사채의 비중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올 들어 발행된 SRI 회사채는 모두 8조1524억원이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전량 사회적채권으로 발행하는 MBS를 제외하면 2019년 이후 처음으로 SRI 회사채 발행량이 특수채(한국주택금융공사 MBS 제외, 3조4600억 규모)를 압도했다.
민간 금융사는 물론 비금융 제조기업까지 앞다퉈 SRI채권을 발행한 덕분이다. SRI FB는 은행채를 시작으로 캐피탈채, 카드채, 금융지주채로 다양화했다. SRI SB를 발행한 비금융 민간기업도 제철사는 물론 화학사, 지주사, 완성차회사 조선사 등 다양하다.
◇대출은 기본, PF로 확산될 가능성도
SRI 금융상품은 채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대출상품(론, Loan)은 등장했고 PF(Project Finance), 파생상품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그린론이 대표적이다. 그린론은 대출로 조달한 자금을 친환경사업에만 투자할 수 있는 금융상품을 말한다. 외국에서는 그린론 금리가 일반 대출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녹색채권 등과 마찬가지로 외부 기관에서 인증을 받아야 한다.
국내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2019년 외화 그린론으로 8000억원을 조달한 것이 최초다. SK E&S와 LG화학, 현대중공업 등도 그린론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NH농협은행 등이 글로벌 금융기관과 함께 국내 기업에 그린론을 제공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는 시중은행이 그린론 주선자로도 등장했다. 하나은행이 딜로이트안진에서 인증을 받아 국내 풍력발전 프로젝트에 원화 그린론을 주선했다. 모두 1000억원 규모다. PF로서도 국내 최초의 그린론 실행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SC제일은행은 포스코건설과 5일 'ESG 연계 파생상품 계약‘을 맺었다. 국내는 물론 스탠다드차타드그룹에서도 파생상품을 ESG와 연계한 최초의 사례다. 포스코건설이 지난해 수주한 폴란드 바르샤바 소각로 프로젝트 관련 선물환 거래가 대상이다. 포스코건설이 온실가스 절감 목표를 달성하면 SC제일은행이 금리 등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밖에 SC제일은행은 포스코건설과 무역금융, PF, 그린론 등에서도 협업하기도 했다. SC제일은행이 포스코건설과 함께 여러 가지 SRI 금융상품을 선보일 수도 있다.
국내 인증기관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SRI 금융상품 다양화를 이끄는 요인이다. 이미 딜로이트안진은 하나은행의 그린론을 인증해 포트폴리오를 쌓았고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도 채권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SRI 금융상품 인증사업을 맡은 조직이 신용평가가 아닌 투자평가본부, 사업가치평가본부, PF평가본부이라는 점도 이런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이 사업부는 인프라, 부동산 관련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검토하는 한편 여기에 맞는 여러 금융상품을 접할 수밖에 없다.
다만 채권 외에 SRI 금융상품 시장이 커지기 어렵다는 시선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대출, PF는 소수의 투자자와 기업이 조건을 협상하는 사모(Private) 구조”라며 “공모채와 달리 공시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만큼 홍보효과 외에 금리절감 등 이점이 적다는 게 한계”라고 말했다.
◇SRI, 장기CP·사모채도 가능?
문제는 또 있다. SRI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금융상품의 범위다. 인증기관의 한 관계자는 “크레딧 측면에서 약점을 지닌 기업들이 주요 조달창구로 장기CP나 사모채를 활용한다”며 “이들이 SRI, ESG라는 타이틀을 붙여 이런 금융상품을 포장한다면 자본시장이 교란되고 투자자들의 혼란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CP는 경제적 실질이 회사채와 다를 바 없어 자본시장을 왜곡하는 주범으로 꼽힌다. 이를 막기 위해 금융당국이 만기 1년 이상인 CP를 발행하려면 증권신고서를 내도록 법제화했지만 효력은 미미하다. 전매제한 조건 등을 설정하면 이런 규제를 피할 수 있어서다.
우려는 이미 현실화했다. 지난해 11월 우리카드가 영세, 중소 가맹점을 금융지원하겠다는 목적으로 이른바 ‘사회적 CP’를 발행했다. 삼정KPMG에서 인증까지 정식으로 받았다. 문제는 이렇게 발행된 CP가 만기 4년, 5년의 장기물이라는 점이다.
SRI 사모채를 문의하는 기업이 있다는 말도 들려온다. 사모채는 공모채와 달리 엄격한 규제가 없을뿐더러 지배구조 리스크 등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투명성이나 투자자 보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발행기간도 짧고 절차가 간편해 공모채 시장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받는다.
이 관계자는 "CP나 대출, PF, 사모채 등은 한국거래소에 상장되거나 외부 공시 의무가 없어 자칫 SRI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흐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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