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기관 중심 수요예측, 약인가 독인가 [1경5000조의 비밀]②직접금융시장 육성기조로 기관 참여 독려 일관...밸류에이션 뒷전 '직무유기' 제동 필요
최석철 기자공개 2022-02-17 13:11:16
[편집자주]
LG에너지솔루션 IPO 이후 기관의 허수 주문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공모주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운용 자산을 훌쩍 넘는 주문을 넣는 기관의 행태가 정당한 수요예측 기능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기관의 욕심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긴 어렵다. 그동안 기관투자자의 수요예측 참여를 독려해온 제도적 허점 역시 주된 배경이다. 이에 국내 IPO시장의 수요예측 제도 현황과 배경, 그에 따른 허와 실을 짚어본다.
이 기사는 2022년 02월 15일 07:2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IPO시장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기관투자자에게 많은 베네핏이 주어졌지만 그에 버금가는 책임도 물어야할 필요성이 커졌다.국내 자본시장이 미성숙했던 시기에는 정부 주도로 IPO시장이 꾸려졌지만 점차 기관투자자의 참여를 유도해 시장 자율적으로 모험자본이 육성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 과정에서 기관투자자에 대한 증거금이 폐지되고 수요예측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투자자의 범위 역시 꾸준히 확대됐다.
하지만 지나치게 기관투자자의 부담을 낮춰주는 방향으로 제도가 변화하면서 밸류에이션과 무관, 물량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는 기관투자자의 ‘직무유기’에 대한 제동은 쉽지 않게 됐다.
때문에 ‘허수 주문’ 등 시장의 본질적 가격 결정 기능을 훼손하는 관행을 깨뜨리기 위해 기관투자자의 증거금 제도 부활, 주관사의 재량과 확대 및 불건전 인수업무 규제 강화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다만 IPO시장의 호황·불황와 관계없이 시장 변동성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 주도에서 시장 자율로 IPO 제도 변화...기관 부담과 책임 모두 낮아져
1999년 이전 국내 IPO 시장의 주도권은 정부가 쥐고 있었다. 기업공개 명령 또는 기업공개 권고 방식으로 기업과 시장보다는 정부의 정책적 판단 아래 기업공개가 이뤄졌다. 국내 자본시장이 태동기 수준으로 미숙했던 만큼 국내 금융시장의 직접금융 기능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직접 신규 공모시장을 육성하고 관리했다.
당시에는 발행사와 하우스가 협의해 공모희망가를 단일 가격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기관투자자뿐 아니라 일반투자자 역시 수요예측에 참여해 공모가를 적어냈다.
현재와 비슷한 시장 자율적 제도가 만들어진 시기는 1999년 전후다. 정부의 직접적 통제가 사라지고 기업공개 관련 업무가 IPO 기업과 거래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현행과 유사한 수요예측 제도가 도입된 시기도 이 때다.
1999년을 전후로 코스닥 시장 버블이 지속되면서 기관투자자가 공모주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공모가를 높게 써내 공모가 거품을 발생시키는 실무관행이 문제가 됐다. 최근에 불거진 ‘허수 주문’ 이슈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여기에 더해 단일 공모희망가가 최저가격으로 인식되면서 공모가 부풀리기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에 국내 IPO시장을 선진화하겠다는 목표 아래 공모가 희망밴드 제도가 도입됐다. 발행사와 주관사가 기준가를 중심으로 적정 밴드를 제시하면 수요예측 참여자가 가격과 물량을 적어내도록 했다. 공모가 산정의 합리성을 더하기 위한 조치다.
국내 IPO 시장의 두번째 변혁기는 2007년 '기업공개 등 주식인수업무 선진화 방안'이 도입된 해가 꼽힌다. 당시까지만 해도 기관투자자 역시 현재 일반투자자와 마찬가지로 수요예측 참여시 증거금을 납입해야했다. 국내 IPO시장이 불황기를 맞이하면서 IPO 기업의 상당수가 대규모 실권주를 발생시키자 이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하지만 2007년 기관투자자의 수요예측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기관투자자의 증거금을 폐지하고 기관별 공모주 청약한도 10만주 제한도 폐지됐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국내 IPO시장에 투자하기를 꺼려했던 해외 기관투자자의 수요예측 참여를 허용하면서 저변을 넓혔다.
그 이후부터는 수요예측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투자자의 범위가 점차 넓어졌다. 2015년 투자자문사와 부동산신탁사가 수요예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이어 2019년에는 자산운용사의 자기자본 요건이 완화되면서 수요예측 참여를 위한 허들은 더욱 낮아졌다.
◇적정 가격 발견 기능 주체 vs 가격보단 물량 확보 노리는 무임승차자
흐름상 국내 IPO시장은 직접금융시장과 모험자본을 육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기관투자자의 부담을 낮추는 쪽으로 제도 변화가 이뤄져왔다.
기관투자자는 투자 전문가로서 새롭게 증시에 입성하는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평가할 수 있는 존재다. 일반투자자와 달리 공모가 가격 결정과정에서부터 참여하게 된 이유다. 더 많은 참여자가 늘어날수록 적정 시장가격을 발견하는 기능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아울러 일반투자자와 달리 기관투자자의 경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레버리지 역량이 뛰어난 기관투자자 비중이 커질수록 단기 공모주 변동과 무관하게 안정적인 IPO시장을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IPO 시장 호황 속에 공모가격 예상보다는 물량 자체에 욕심내는 기관투자자가 우후죽순으로 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됐다. 특히 기관투자자 전체 풀(pool)이 크게 늘어난 데다 공모주 배정의 형평성을 위해 기관투자자 배정물량이 줄어들면서 물량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자연스럽게 ‘허수 주문’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게 됐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으면서 수요예측 기능이 마비된 모습이다.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다만 일각에서 거론되는 기관투자자 증거금 제도 부활에는 신중해야한다는 것이 IB들의 주된 의견이다. 시장에는 호황기와 불황기가 반복되는 싸이클이 있는 상황에서 자칫 IPO시장의 침체를 가속화할 수 있다. 일반투자자의 참여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기관이 굴리는 돈과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아울러 해외 IPO시장에서도 기관투자자가 수요예측 참여시 내야할 증거금은 없다. 국내에만 증거금 제도가 부활한다면 증거금이 묶이는 것뿐 아니라 송금과 환급 등 추가 절차 등을 피하려는 해외 ‘큰손’ 투자가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관증거금 부활은 '신중'...수요예측 참여기관 제한 필요성 '한목소리'
이에 주관사의 공모주 배분뿐 아니라 수요예측 과정에서 재량권을 확대하는 방안도 하나의 대안으로 꼽힌다.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 자격을 주관사가 결정하는 방식이다. 수요예측 제도와 공모주 배분을 다수가 참여하는 형평성이 아니라 가격 결정 기능을 강화하는 효용성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다수의 수요예측 참여자가 존재하고 호황기를 맞아 공모주가 저평가된 것으로 예상될 경우에는 굳이 비용을 들여 밸류에이션에 착수하기보다는 물량을 배정받을 수 있는 최고가격으로 써내는 것이 유리한 전략이다. 일종의 무임승차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해외 증시는 주관사가 장기적 관계를 맺은 기관투자자 집단을 보유하고 있다. 수요예측 과정에서 투자자 집단과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IPO기업의 가치를 평가하고 공모가격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다수의 평가보다는 소수의 정예화된 전문가 집단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셈이다.
국내 IPO시장의 경우 최소한의 자격 요건만 채우면 수요예측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주관사가 모든 기관투자자에 대한 전수조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투자설명회 등을 거치며 네트워크를 쌓은 기관투자자로만 참여 자격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경우 불건전 인수업무에 대한 규제 역시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이해상충 배정이나 대가성 배정 등이 이뤄졌을 경우 인수회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엄격한 규제 조항을 신설해 주관사와 기관투자자간 담합행위가 나타나지 않도록 살펴야한다.
이런 방식이 도입되면 주관사의 역량이 한층 극명하게 갈릴 가능성이 높다. 국내 IPO시장에서 주관사간 평판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얼마나 큰 IPO 딜을, 얼마나 흥행시켰는가에 초점이 맞춰졌을 뿐 상장 이후 주가 흐름에 대한 평가 등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주관사의 재량권이 확대될 경우 얼마나 앵커 투자자를 확보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북빌딩의 완성도는 어땠는지, 실제 공모주의 수익률은 어땠는지 등이 새로운 주관사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한국 신규공모시장의 구조분석’ 보고서를 통해 “인수인이 참가자를 제한할 수 있고 물량배정에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요예측 제도에서는 인수인이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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