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 기업 재무관리 비상]여천NCC가 쏘아올린 공, 대기업 자금줄 흔들①'중대재해'만으로 전방위 조달위기 우려…ESG 확산 속 투자 배제 가능성
이경주 기자공개 2022-02-21 07:30:26
[편집자주]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기업의 우려는 형사처벌로 인한 경영책임자의 부재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잠재해 있었다. 신용도에 문제가 없는 기업이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는 이유로만 채권 공모에 실패했다. ‘기업 자금줄’을 흔드는 악재로 비화한 셈이다. 채권은 한 단면이다. 유상증자나 인수금융 등 전방위적으로 조달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더벨이 중대재해가 주는 재무적 파장에 대해 점검한다.
이 기사는 2022년 02월 16일 16:1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1월 27일 시행됐다. 공교롭게도 법 시행 전후로 HDC현대산업개발과 신대양제지, 삼표산업, 여천NCC 등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 업계는 1호로 처벌 받을 기업과 경영책임자가 누가 될 것인지에 관심을 쏟았다. 또 경영책임자 공백으로 인한 경영차질을 걱정했다.그런데 여기까진 여천NCC가 회사채 발행에 나서기 전까지의 화두였다. 법 시행 후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이 첫 회사채 조달을 시도했다. 그런데 한 건도 신청되지 않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중대재해만 발생해도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것일까. 전문가는 “상당 기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의 재무적 리스크로 비화하는 원인이 된 셈이다.
회사채는 기업의 다양한 자금조달 방식의 하나다. 파장은 유상증자나 기업공개(IPO), M&A(인수합병) 인수금융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할 수 있다. 비우량기업에겐 생존의 문제가, 우량기업에겐 자금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하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직전 A+급은 99.9% 완판…여천NCC 조사결과도 안 따졌다
여천NCC는 신용등급이 A+(안정적)으로 양호한 기업이었다. AAA와 AA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A+급은 회사채 금리도 적절히 높은데다 재무적 안정성도 갖춰 기관들이 선호하는 대중적인 등급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6월 이후 올해 2월 16일 현재까지 A+급 회사채는 총 46건, 금액으로는 4조1850억원어치가 발행됐다. 이 중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이 난 경우는 단 1건(코리아세븐)에 그쳤다. 미매각금액도 20억원으로 크지 않았다.
이번 폭발사고가 사업적으로 큰 타격이 된 것도 아니었다. 한국기업평가는 이달 14일 스페셜코멘트를 통해 “금번 사고로 인한 기계적 손상이 크지 않아 한달 정도 가동 중단이 이뤄져도 관련 손실 규모가 제한적”이라며 “신용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입장을 밝혔다.
여천NCC 전량 미매각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수치다. 결국 중대재해로 인한 ESG 평판 하락 가능성에 시장이 화들짝 놀라 발을 뺐다.
정황을 시간별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천NCC에서 여천 공장에서 8명의 사상자(4명 사망)가 나온 폭발사고는 이달 11일 금요일 오전 발생했다. 그리고 2000억원 공모채 모집을 위한 수요예측은 이달 1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했다.
고용노동부와 경찰이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할 상황인지에 대해 조사를 한참하고 있을 타이밍이었다. 법에 따르면 중대재해가 발생한 것만으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안전·보건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라는 것이 입증돼야 처벌대상이다.
그런데 투자자들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것만으로 여천NCC를 외면했다. 기업입장에선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다. △중대재해만 발생해도 투자유치가 힘들어지는 것일까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언제까지 회사채 발행이 제한되는 것일까 △영구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인가?
◇올해가 ESG투자 원년…국민연금 “문제 기업엔 투자 말라”
전문가들은 상당 기간 여천NCC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기업은 회사채 발행이 제한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최대 큰손인 국민연금의 ESG 투자기조에 기인한 전망이다. 국민연금이 ESG 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것은 2년 전이었다. 김용진 이사장이 2022년까지 전체 자산의 50% 비중으로 ESG투자를 늘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특히 올해를 ESG 투자의 원년으로 삼았다. 세부적인 가인드라인까지 세워 자금운용을 위탁받은 기관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ESG에 반하는 기업엔 투자하지 말라는 것이 골자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민간석탄화력 발전사와 같이 오염물질을 배출해 매출을 내는 기업은 투자대상에서 배제할 것을 주문했다”며 “중대재해와 같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기업도 배제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위탁기관들에게 전달한 가이드라인(지침)”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연금은 2021년 10월 말 기준 335조원을 국내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으로부터 자금운용을 위탁받은 기관들이 시장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국민연금 참여여부에 따라 회사채 수요예측 결과가 달라진다. 전체 시장이 국민연금이 선호하는 종목을 따라갈 수 있다.
앞선 관계자는 “올해가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ESG투자)한 원년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지대할 것”이라며 “중대재해가 발생한 곳은 당연히 투심이 제한될 것이고, 도전했다가 철회하는 기업도 나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파장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는 이유는 불확실성이 해소되는데 오래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여천NCC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외면한 것은 불확실성 탓이다. 위험성이 높은데 굳이 투자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위해선 우선 사례가 누적돼야 하는데 시간을 요한다. 대형 증권사 크레딧 연구원은 “이 정도 사고면 처벌수위가 어느 정도 된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사례 누적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중대재해로 인한 ESG리스크 크기를 가늠할 수 있고 기관들이 금리조건을 따지며 투자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명확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투자자입장에선 섣불리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당국도 선례를 잘 남겨야 하기 때문에 심사숙고를 할 것이고, 또 기업과 경영책임자가 처벌을 받을 경우 소송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파장은 기업의 재무관리 전반적으로 확산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상장 대기업의 경우 국민연금이 대부분 지분 투자하고 있다. 지분율이 5%가 넘어 공시를 하는 곳도 많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이후 유상증자를 진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국민연금은 불참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연장선에서 국민연금 주요 투자처인 기업공개(IPO)나 M&A 인수금융 시장에서도 중대재해가 발생한 곳은 외면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탓에 최고재무책임자(CFO) 역할도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처 시나리오를 미리 수립해놔야 한다. 시장 분위기에 상관 없이 지원사격을 해 줄 수 있는 우호적 기업이나 금융기관, 사모채 투자자들과의 인적네트워크 확보와 강화가 요구된다.
앞선 신평사 관계자는 "당장 급전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있는 은행이나 사모채투자자가 있는지 여부가 유동성 위기 대응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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