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7월 17일 07:5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시장 원리의 마비를 거론할 때 흔히 인용되는 사고 실험이다. 심문을 받는 용의자들이 각자 이익을 극대화한 선택지를 고르지만 오히려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인다.최근 기업공개(IPO) 시장을 보면 죄수의 딜레마 속 용의자들이 떠오른다. 가격제한폭 확대로 시장이 달아올랐지만 결과에 만족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물량 경쟁에 몰린 기관 투자가들은 허수성 주문을 쏟아내며 볼멘소리를 낸다. 일반 투자자들은 레버리지를 활용해 청약에 참여하며 자본시장의 탐욕을 탓한다.
예상치 못한 흥행 성적표를 받은 발행사 역시 유쾌하지만은 않다. 당장 조달 자금이 늘긴 하지만 내심 상장 이후가 두렵다. 턱없이 치솟은 주가가 하락하면 주주들의 매서운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상장을 주관한 증권사도 시장 과열이 달갑진 않다. 주가가 요동치면 실사와 기업가치 평가를 도맡은 증권사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허수성 청약으로 물량을 확보한 기관은 어떨까. 상장일 급등한 가격에 배정 주식을 팔아치우면 수익률은 올라간다. 다만 이런 요행이 또 반복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관성처럼 풀배팅에 나섰다가 속된 말로 물리는 사례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주가는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행복한 사람은 없다. 발행사와 주관사, 기관 참여자와 일반 투자자 각자 최선의 선택을 내리지만 모두가 불만족스럽다. ‘가격 발견’을 위해 도입한 수요예측 제도가 마비되며 나타난 풍경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결론은 공신력 있는 기관의 개입이다. 시장이 멈춘 곳에 정부가 나선다는 해법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런 상황을 만든 가장 큰 원인이 정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 수요예측 개편을 예고한 금융당국은 올해 가격제한폭 확대를 먼저 적용했다. 상장일 ‘천정’이 400%까지 오르며 때아닌 활황이 찾아왔다. 호황기였던 2021년처럼 공모 물량 전부를 주문하는 비정상적인 주문 행태가 부활했다.
제도 개선 취지를 탓하고 싶진 않다. 개편 당시 발표를 보면 수요예측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확약 기관에 물량을 우선 배정하고, 허수성 청약을 억제하겠다는 방안도 내놨다. 문제는 정책들이 각자 따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관행이 여전한 가운데 가격제한폭만 올라갔다. 진정세를 보이던 시장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다.
공모주 수요예측 제도는 2000년 처음 시행됐다. 도입 후 23년이 지나며 나름대로 제도적 균형이 만들어 졌다. 실행 가능한 대안부터 빠르게 실행하는 접근법이 이런 ‘생태계’를 망가뜨린 것은 아닐까. 뒤늦게라도 금융당국의 정책 패키지가 제대로 적용됐으면 좋겠다. 때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오랜 기간 작동한 제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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