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04월 23일 07:3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20년 별세하자 유족들은 그가 평생 모아온 2만3283점의 예술품을 2021년 4월 국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기증품에는 국보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이중섭, 김환기 등 국내 작가들의 그림과 피카소, 모네의 그림 등 세계적 희귀작들이 넘쳐난다. 국보 14점, 보물 46점이 포함돼 있으며 총 추정가치가 약 3조원에 이른다고 한다.정부는 기증자의 취지를 존중해 2028년까지 이번 기증품만으로 이뤄진 독립된 미술관을 짓겠다고 2021년 11월 밝혔다. 정부는 이 미술관의 이름을 '(가칭) 이건희 기증관'으로 전했다. 미술관은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 녹지공원 부지에 들어선다.
인생이 참 묘한게 송현동 부지는 이건희 회장과 오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해방 후 50년 가까이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활용되던 송현동 부지를 처음 인수한 곳이 바로 삼성생명이다. 이후 송현동 부지는 한진그룹과 서울시를 거쳐 현재 문화체육부가 소유하고 있다.
이 회장은 1997년 이 부지를 1400억원에 매입해 미술관, 공연장 등의 문화시설 건립을 추진했지만 각종 규제의 벽에 막혀 꿈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이 회장이 생전에 원했던 땅에 자신의 이름이 걸린 미술관이 들어서는 셈이다.
송현공원은 경복궁 우측에 위치해 서울 도심에서 건축물의 방해를 받지 않고 북쪽 북악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부지도 총 3만6900㎡로 서울광장의 6배에 달한다. 2022년 10월 100년 만에 문을 열고 온전히 시민 공간이 된 이곳의 한쪽에 이건희 미술관이 지어진다.
이 회장에게 문화란 무엇일까. 단지 돈많은 부자의 고상한 취미를 넘어 어느 순간부터 의무가 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2004년 10월 리움미술과 개관식에서 이 회장이 남긴 축사를 들어보면 문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읽을수 있다.
"문화 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 덕에 우리는 세계 어는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예술 작품을 한 곳에서 관람하는 호사를 누린다.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했지만 그 말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미술시장 전문가들은 이건희 컬렉션 덕분에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의 평가가 크게 높아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건희 미술관이 건립되면 '이건희 컬렉션'이란 명칭이 한류처럼 전파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 컬렉터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미술품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 뿐만 아니라 재벌 오너의 안목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라고 말했다.
생전 이 회장만큼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었던가. 한국에서 가장 돈많은 사람으로서 그가 느꼈을 긴장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그 순간, 팽팽한 긴장의 끈을 잠시나마 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추측해본다.
내가 죽는 순간부터 '나'는 내 손을 떠나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무관한 누군가가 된다. 결국 고인에 대한 평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재용 삼성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의 컬렉션 기증 결정은 그런 면에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상속세의 물납제도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서도 고인의 철학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아들 이재용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모든 사람이 예술 작품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만는 것, 죽어서야 겨우 꿈을 이룬다. 우리나라 재계의 상징 이건희란 이름 석자는 곧 지어질 미술관을 통해 불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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